오로지 1등만 키워내는 교육,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이 보장되는 교육 속에서 학생들의 재능과 적성, 재미와 행복은 찾아볼 수 없다. 부모들은 자신이 걸어온 고생길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부모와 학부모의 차이’라는 공익광고의 내용은 우리교육 현실에 대한 뼈아픈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 어른들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경험으로부터 깨달은 삶의 진리를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강권하려는 성향이 있다. 아이들이 걸어갈 앞으로의 인생과 부모들이 걸어 온 인생은 결코 비슷하거나 동일하지 않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체험적으로 깨달은 삶의 지혜를 전수받을 필요는 있지만 어른들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 특히 길 밖의 길을 가려는 아이들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지식에 용기가 빠진다면 그 지식은 학생들의 용기 있는 결단을 촉구할 수 없다. 교수법의 핵심은 가르치는 사람의 목소리와 사연, 체험과 열정, 주관과 해석이 가미된 지식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있다. 사상이 사상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갖게 하려면 사상에 나의 느낌과 아픔을 가미해서 내가 실천한 체험적 스토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 설명도 중요하지만 감성적 설득이 중요한 이유는 머리로 이해된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가슴으로 와 닿지 않으면 실천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학생들을 이해시켰지만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궁극적인 실천으로 연결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일곱 가지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줘야 할 일곱 가지 용기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앞에 나오는 사자성어는 위기를 지칭하고 뒤에 나오는 사자성어는 위기를 극복하는 용기를 지칭한다. 첫째,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난국에서도 크게 생각하고 크게 이루려는 대사대성(大思大成)의 꿈을 가져야 한다. 학생들이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옆으로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가르침의 진면목이다. 학생들이
배움은 알고 싶어 하는 뭔가에 끌려가서 마침내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석의 N극은 S극을 끌어당기고 S극은 N극을 끌어당긴다. N극은 Nothing을 의미하고, S극은 Something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은 뭔가(Something)를 끌어당기지만 사실은 뭔가(Something)에 끌리는 것이다. 배움은 본래 아무것도 아닌 상태(Nothing)로 시작해 뭔가(Something)를 끌어당기는 과정에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자기 변신의 과정이다. 배움은 또 전혀 다른 N극과 S극처럼 이질적인 정보와 정보,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과 사물 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방향을 찾기 전에 양극은 서로를 멀리서 끌어당기다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는 상봉(相逢)한다. 이렇게 아무 관계없는N(Nothing)극이 S(Something)극을 끌어당겨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끌어당기는 힘은 상대 입장에서는 끌림으로 작용한다. 비슷한 관심과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나와 전혀 다른 관심과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 배움의 불꽃이 튀긴다. 사람은 낯선 곳과 낯선 것에 호기심을 갖는다
앎이 깊어질수록 기존의 앎에 상처가 생긴다. 새롭게 알아갈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져 아픔의 강도는 심해진다. 그 아픔이 두렵다면 앎의 행로를 멈춰야 한다. 그런데 앎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숱한 상처의 흔적에 기억과 추억이 새겨지고 아름다운 앎의 무늬로 재탄생한다. 아픔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앓음다움'과 '아름다움'은 동격이다. 기존의 앎을 깨뜨리면 얼룩이 생기고 깨달으면 무늬가 생긴다. 아픈 앎의 뒤안길에 생긴 숱한 얼룩이 아름다운 무늬가 된다. 아름답게 보이는 쇼윈도의 마네킹 뒷면에는 수많은 시침이 꽂혀 있다. 마네킹은 보이지만 마네킹을 아프게 하는 시침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앎의 무늬이지 아픔의 얼룩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얼룩 없이 앎의 무늬가 생기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면 아프다. 그 통증을 감내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앎의 행로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앎의 행로를 부단히 전개하는 것밖에 없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만약에 다음과 같은 4지 선다형 문제를 냈다고 가정해보자. 다음 네 가지 항목 중에서 세 가지는 공통된 특성이 있어서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데 나머지 하나는 그 세 가지에 포함시킬 수 없는 항목이 있다. 무엇일까? ①배추, ②소나무, ③칼, ④고추. 교과서적인 정답은 물론 ③칼이다. 왜냐하면 배추, 소나무, 고추는 생물이고 칼은 무생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교육은 기존의 범주체계를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칼이라는 정답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어떤 학생은 위 문제의 정답을 ②소나무라고 답했다. 그 이유는 배추, 칼, 고추는 김치 담그는데 필요한 항목이고 소나무는 김치 담그는 것과 관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방법에 익숙하다. 예를 들면 1.5 + 5 = ( )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6.5라는 답을 찾는 것이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 ) + ( ) = 6.5라고 했을 때, 더 해서 6.5가 될 가능성은 부지기수다. 정답을 찾는 문제는 답이 하나지만, 문제를 찾는 문제는 답이 여러 개다. 오늘날 전 세계 유수기업의 CEO, 할리우드의 영화감독, 노벨상 수상자
'體認知=Change=體認智' 철학은 영어의 변화에 해당하는 ‘change'를 발음하면 ’체인지‘로 읽힌다는 점에 착안해 창안한 새로운 변화지향적 학습관이자 지식관이다. 체인지 철학에 따르면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몸(體)이 동반된 ’고통‘ 체험이 있고, 그 가운데 지적 ’고뇌‘의 작용으로 새로운 깨달음이 인식(認識)으로 다가오면서 마지막 순간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정리된 결과가 바로 지식(知識)이라는 것이다. 체인지 철학은 머리로 고민만 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매개로 결연한 실천을 전개하지 않는 고통체험이 생략된 창백한 교실학습의 폐단을 지적한다. 나아가 내 몸이 직접 움직여서 내가 고통체험한 결과 창조해내는 지식만이 나의 사고방식, 행동, 삶의 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식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체인지 철학은 디지털 시대의 만개와 함께 한 없이 가벼워지고 빨라진 지식담론에 무게와 여유, 그리고 느림의 철학을 반영하려는 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체인지 철학은 기본과 토대 없는 가벼운 디지털 지식담론의 위험과 위기현상에 경종을 울리고, 그런 지식관이 만들어가는 위험 사회에 맞서 대항할 수 있는 대안담론인 것이다. 체인지 철학은 지식을
공부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현상에 대해서 남다른 호기심과 의심의 눈초리로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시비를 걸면서 의문을 던지고 구체적인 질문으로 만들어보는 과정이다. 공부는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현명한 답, 현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보다는 당신의 질문은 무엇입니까?가 더욱 중요하다. 남다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그 동안 남들이 던지지 않은 질문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연구 성과물을 통독(通讀)하고 정독(精讀)하면서 묵독(黙讀)해서 기존의 학자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며, 물론 그렇다고 간과한 부분을 들춰내야 하며, 원래 그렇다고 폄하한 부분을 헤집고 드러내야 한다. 평이한 질문은 식상한 답을 가져다주지만, 색다른 질문은 일면 몰상식한 답을 가져다준다. 지금 당장 겉으로 보기에 몰상식해 보이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몰상식한 답에 세상을 뒤집는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학문발전은 소수의 몰상식한 사람이 일으킨 지적 혁명의 산물이다. 몰상식한 소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몰상식한 사람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조소와 조롱, 비난
물은 굽이굽이 흘러서 바다로 간다. 바다로 흘러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로 내려온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이유는 바다가 다 받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다가 이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 줄 수 있는 원동력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내려감은 올라감이다.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아래로 두려움 없이 내려가는 용기도 필요하다. 폭포는 자신이 아래로 떨어질 시점에서 고민하거나 멈칫거리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던진다. 아래로 떨어진 물은 다시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물을 받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계적으로 물을 퍼 올리는 서양의 분수 밖에 없다. 폭포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지만 분수는 기계적 힘에 의해 강제로 올라갔다가 추락한다. 학생들의 아픔을 감지하려면 학생들에게 내려가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위에서 ‘관망’하지 않고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내려가서 ‘관찰’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감동적인 수업을 하려면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학생들의 마음을 읽으려면
‘가르치다’는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 배우게 하다는 말이다. ‘가르키다’는 '가르치다'의 잘못된 표현이다. 예를 들면 ‘동생을 가르켰다’가 아니라 ‘동생을 가르쳤다’가 맞는 말이다. ‘가르치는’ 일에는 언제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특정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 거기에 담겨진 철학과 신념, 지식을 얻는 동안 고뇌했던 체험적 열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받는 감동은 ‘가르침의 기교’에서 오지 않고 가르침에 임하는 스승의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가르침은 기법과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열정, 자세와 태도의 문제다. 제자가 원하는 것은 전달하는 메시지보다 메시지에 대한 스승의 관점과 철학, 체험적 스토리와 열정이다. ‘가르치다’라는 말과 혼동될 수 있는 말이 바로 ‘가리키다’이다. ‘가리키다’는 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말이다. 스승은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므로 ‘가르침’은 곧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다. 가르침과 배움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가르치는데 배울 의욕과 열정이 없다면 가르침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 없는데 배우려는 사람만 의욕이 강하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현상이 될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도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밖에서 쪼는 사람은 스승이고, 안에서 쪼면서 알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은 학생이다. 알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어미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과정을 도와줄 뿐이다. 가르침과 배움도 고장난명과 줄탁동기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한 판의 춤이다. 멋진 춤을 추기 전에는 항상 마음이 설레듯이 멋진 가르침과 배움의 여정에는 언제나 깨우침과 깨달음의 즐거움이 있다. ‘깨달음’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깨달음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깨달음에 담겨진 의미를 알면 이해가 갈 수 있다. ‘깨닫다’는 ‘깨다’와 ‘닫다’가 어우러진 말이다. ‘깨다’는 잠과 꿈과 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