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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군대를 격파하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악티움해전에서는 물론 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참패했다. 그리하여 승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고 더불어 공화국 로마는 ‘제국 로마’로 변신했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우연론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사는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줄곧 시비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하자면 여성미의 척도인 코 높이가 알맞지 않아 클레오파트라가 그처럼 절세미인이 아니었을 경우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악티움해전은 없었을 것이고, 더불어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로마제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논리다. 근대의 사가와 역사철학자들 대부분은 “러·일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역사 필연론과 함께 우연론을 배격하지만,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코 가설 같은 우연론의 매력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갈리아(현 프랑스 지역)의 정복자로 입신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 세력가가 득세하고 원로원의 권위가 흔들리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공화국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원로원을 누르고 폼페이우스 등과 함께 이른바 ‘삼두(三頭)정치’를 폈다. 이후 그는 결국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제거하고 원로원까지 손에 넣어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지만 브루투스·카시우스·키케로 등의 공화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주지하듯이 카이사르 암살사건은 셰익스피어의 팬을 통해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살아남았다. 고결한 도덕성을 자랑하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은 카이사르의 부장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등을 제거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장례식 날 안토니우스는 유혈이 낭자한 카이사르의 옷을 흔들며 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내는 추도사를 하고 카이사르의-양자 옥타비아누스는 뒤이어 돈을 풀어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브루투스 일당을 타도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공화국 말기의 로마를 통치했다. 바로 제2회 삼두정치다. 그러나 권력, 특히 최고 권력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임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두 번째 삼두정치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북아프리카의 통치자 레피두스가 탈락한 후 서부지역 통치자 옥타비아누스와 동부지역 통치자 안토니우스는 결국 세계국가 로마의 주인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라고 해서 오랫동안 최고 권력을 공유하도록 역사가 허용할 리 없었고, 더불어 로마는 귀족공화국일 뿐이었지만 공화국으로 존속할 수 있을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아래에서 그 추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카이사르의 사후 안토니우스 유혹 영역을 크게 넓힌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점령한 후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했고, 세기적 사랑을 자랑한 두 사람 사이에서 케사리온이 태어났다(카이사르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후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에 갔다가 카이사르가 살해된 후 황망히 귀국해야 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실력자 안토니우스를 제2의 기회로 삼기로 작정했다. 당시 28세(혹은 29세)였던 그녀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 갖가지 선물을 챙겨 소아시아의 타르수스로 마중을 갔고 그는 그녀에게 넋을 빼앗겼다(그가 이집트에서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14살 때였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원정을 위해 결국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고,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로마로 로마를 공격하는’ 책략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원로원에서 남편을 비방하는 연설을 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살해되어 머리만 로마로 보내져 효수된 키케로(그는 로마를 대표한 철학자요, 연설가였다)의 늘어진 혀에 바늘을 꼽기까지 했지만 남편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이집트에서 로마로 일시 귀환한 안토니우스는 풀비아가 죽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하는 등 한동안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속을 자랑했다. 뛰어난 미인으로 소문난 새 아내 옥타비아로부터 두 딸을 얻었지만 이미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안토니우스가 점차 강화되어 가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르티아원정을 단행하면서 양인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재회를 즐기며 옥타비아누스와 자웅을 겨루기로 작정한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아내 옥타비아에게 장문의 이혼편지를 보낸 후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그처럼 다시 동방행을 단행하자 로마에서의 그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고 일부 지지자들은 그와 동행하지 않고 잔류했다. 옥타비아누스로서는 호기를 맞이했지만 공화국 로마의 운명은 반대로 풍전등화 같은 처지가 되었다. 로마를 이용한 로마 공격에 실패해 기원전 31년 9월 레바논 앞 바다 악티움해. 옥타비아누스 휘하 함대와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연합함대는 악티움해를 붉게 물들이면서 격돌했다. 500척의 함선과 7만 여의 보병을 동원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해에 진을 쳤다. 이오니아해로부터 내려온 옥타비아누스의 400척 함선과 8만 보병은 안토니우스군과 이집트군의 연합을 막으려 했다. 일부 동맹세력의 이탈과 보급품의 부족을 느낀 안토니우스가 먼저 공격했다. 육전에서의 세(勢) 불리를 의식했든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였든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조언을 쫓아 해전에서 결판을 내기로 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암브라시아만 밖으로 나와 서진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소형함대가 뒤를 따랐다. 곧 격전이 벌어졌고, 양측의 소형 함선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갤리선들을 빼내 전장을 벗어날 때까지 서로 상대 함선의 측면을 공격하려 애썼다. 결국 크게 패한 안토니우스 또한 몇 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랐다. 뒤에 남은 안토니우스의 함선들은 항복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뒤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대패한 후 해전 일주일 후에 투항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의 전령이 알렉산드리아의 궁전에 도착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죽어 황금침대에 누워 있었다. 갖은 기교를 동원해 승자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했지만 실패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달라는 편지를 쓴 후 자신이 죽은 줄로 오인하고 자살한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이집트 왕실의 상징인 코브라에 물려서 말이다. 39세 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묻혔고 더불어 로마공화국도 역사의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클레오파트라.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을 뜻한다든가. ‘나일강의 악녀’로도 불리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여신 비너스와 더불어 흔히 서양의 여성미를 상징한다. 하지만 주화나 부조에 남아있는 클레오파트라는 미인이기보다는 매력적 여인으로 보이게 한다. 그녀는 육감적 입과 의지적인 턱, 부드러운 눈매, 넓은 이마,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역시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줄이 많은 현악기 음색을 가졌다.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든 황제 안토니우스를 꺾은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1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때까지 사실상 로마를 통치해온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자)’란 칭호를 바쳤고 군대는 임페라토르(imperator, 군사령관 - 황제 emperor의 어원)란 칭호를 바쳤다. 그는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공화국 로마는 제국 로마로 바뀌었다. 원로원은 존속했으나 제위를 장식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러나 황제로 군림하기보다 공화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는 ‘존엄한 황제고 신 같은 카이사르의 아들’이란 칭호보다 ‘제1시민(프린켑스)’이란 칭호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제1시민으로 자처했다고 해서 그의 지배체제를 ‘원수정’으로 부르거나 원로원에 지난날 권력의 일부를 부여했다고 해서 ‘양두(兩頭)체제’로 불리기도 한다. 일체의 허식을 피한 그는 검소하게 생활한 반면 흉년에는 황실금고를 열어 굶주리는 빈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매년 수회에 걸쳐 유희(서커스)를 베풀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투스가 절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 전통의 공화제를 경시하다 결국 공화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공화주의자로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행정, 군사,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그는 상비군제도의 도입 이외에도 세제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추진했다. 전성기의 로마제국은 스페인, 프랑스, 북아프리카 등지에 50여 개의 속주를 두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징세청부제를 폐지하는 등 속주통치체제도 정비하여 제국이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토대를 튼튼히 닦았다. 그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 로마로 만들었다”고 자부했고 40여 년에 걸친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500년 제국역사의 단단한 기틀 마련 하지만 제국 초에는 네로와 같은 용렬한 황제들로 인해 국기가 적잖이 흔들렸다. 3대 황제 칼리굴라는 연회에 초대된 신하의 아내들과 성적 유희를 즐겼는가 하면 말(馬)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고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황후의 치맛바람을 벗어나지 못하다 결국 네 번째 황후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로는 모후와 의붓동생을 죽이는 것도 부족해 로마시를 불태우고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기초를 튼튼히 놓았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팍스 로마나’의 번영기를 포함한 500년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를 운위(云謂)하는 자들이 전술했듯이 그녀의 뛰어난 미모가 악티움해전을 낳았고, 그로 인해 세계국가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뀌고 세계도 더불어 제국적 질서로 바뀐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좀 높거나 낮아 절색이 아니었을 경우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고 악티움해전도, 아우구스투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제국으로의 변신이 과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을까? 사실 로마공화국은 300여명의 종신 귀족 원로원 의원들이 거의 전권을 행사한 귀족공화국이었을 뿐이고 또 제국으로 변신하지 않았어도 동일하게 최강의 국가로 군림하면서 주변 민족과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거나 지배했을 것이다. 아니 세불양립(勢不兩立)이 역사의 이치이니 클레오파트라가 없었어도 또 다른 악티움해전은 있었을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 코’ 운운하는 것은 우연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역사의식의 발로이다. 우연론은 역사적 방법론을 파산으로 이끌 뿐이라는 데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다. 짧고 함축적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잘 표현한 시라는 느낌이 든다. 의사소통의 부재, 고독과 소외가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 도시의 현대인들에게,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그 섬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인의 말처럼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섬을 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섬의 존재를 인정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관계 맺기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과 세상을 연결하는 꼬마 소녀 이렇듯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음을 열고 소통하기란 쉬운 문제가 아닐진대, 나와 전혀 다른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서로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 그 대상이 청각장애인일 경우 과연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비욘드 사일런스〉는 제목 그대로 ‘침묵을 넘어서 말이 아닌 마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영화다. 독일 남부지방의 작은 마을. 청각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딸 라라(실비 테스튀)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바깥 세계와 부모 사이의 다리가 된다. 가족 중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라라는 부모에게 보물과도 같은 존재다. 수업도중에도 은행에 대출협상을 하러 부모님과 함께 가야 하고 학교에서 들은 지시사항들을 일일이 전달해야 했지만, 불평 없이 모든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던 착하고 귀여운 꼬마 소녀였다. 소리를 듣지도 말할 수도 없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 마틴(마티아스 하비흐)은 영리하고 착한 딸과 보내는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는 종종 라라와 소리 알아맞추기 게임을 하곤 했다. “해가 뜰 때는 어떤 소리가 나지?” “눈이 땅에 닿을 때는 어떤 소리를 내지?” 일반인들에겐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인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이 마틴에겐 타인의 손을 의지해야만 겨우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특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그는 일상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의 소리를 딸을 통해 느끼고 싶어 한다. 어린 고사리 손으로 수화를 배워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는 라라. 그녀의 부모님은 라라가 태어남으로 인해, 그동안 캄캄한 암흑이었던 세상의 소리와 연결될 수 있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족과 자아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 여덟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은 라라. 그날 라라는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이며 아름다운 고모 클라리사로부터 클라리넷을 선물 받는다. 그날부터 라라에게는 음악이라는 새로운 소리의 세계가 열리고, 연주에 소질을 보인 그녀는 자라면서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마틴은 딸이 클라리넷에 점점 빠져드는 것을 싫어한다. 클라리넷 연주는 마틴의 누이동생 클라리사가 즐기던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였던 마틴은 누이동생의 연주를 보고 경탄하는 식구들과 손님들에 의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동생 클라리사의 그늘에 가려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라라가 자신과는 단절된 바깥세계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라라와 클라리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점점 외로움을 느낀다. 십년 후 라라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게 된다. 라라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클라리사는 그녀를 베를린의 음악학교에 입학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가족의 사랑사이에서 고민하던 라라는 결국 베를린으로 향한다. 청각장애인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불편한 환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착한 딸이었지만, 한편으론 그것은 다른 세상과 교류가 차단된 고립된 환경이었고 고집스런 아버지의 집착은 라라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그러기에 라라는 자신 앞에 주어진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마틴은 라라가 아버지 대신 고모를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친밀했던 딸과 아버지와의 골은 이제 지울 수 없을 만큼 깊어지게 된다. 음악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며 고모 부부와 함께 지내는 베를린 생활. 자신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대도시에서의 일상이 펼쳐지는 그 곳에서 라라는 매일매일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며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던 중 남자 친구 톰을 만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라라의 마음 한 구석을 붙잡는다. 짧았던 사랑을 남기고 톰이 유학을 떠나려고 할 때 라라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외골수가 되어가는 아버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그녀를 우울하게 한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라라는 아버지와 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심한 간섭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한다. 결국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음악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하다 〈비욘드 사일런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아버지와 딸이 ‘침묵을 넘어’ 서로 이해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관객인 우리들은 소리 없는 청각장애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관계 맺기와 가족의 의미, 자아 찾기라는 인생의 본질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와 딸의 화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바로 라라가 연주하는 음악이다. 딸이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어 자신의 품을 떠나는 것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몰래 딸의 학교로 찾아간다. 텅 빈 강의실, 홀로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라라를 뒤쪽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버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딸과 눈을 마주친다. 청각장애인으로 고통스런 시절을 보냈던 마틴. 세상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던 아버지는 라라의 음악을 마음으로 듣게 되면서 비로소 딸의 세계를, 다른 세상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고개를 갸우뚱 할 사람들이 혹시 있다면, 딸과 아버지가 음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연주 장면을 놓치지 말기를 권한다. 언어 너머의 세계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클라리넷 연주와 진심으로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배우들의 표정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잊히지 않는다. “저를 잃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사랑했고 언제나 ‘아버지의 소리’로 남을 거예요. 침묵 너머 영원히….” 라라의 이 대사는 감독이 담아내고자 했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소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버지와 일반인인 딸이 둘 사이에 놓인 침묵을 넘어 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 힘들지만 소중한 가능성에 대해 감독은 ‘그렇다’고 말한다. 실제 청각장애인의 감동적인 연기 사람들은 매일매일 수많은 말을 쏟아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만 그럼에도 서로 소통이 안 된다고 느끼고 외로워하며 때때로 상처를 입고,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언어가 진정한 관계 맺기에 있어 과연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기에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것만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때때로 표현이 어눌한 사람들이나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답답해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소리로 들리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은 아마도 마음일 것이다. 침묵 가운데서도 상대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그런 마음…. 비욘드 사일런스는 촘촘하게 잘 짜인 한 편의 성장 영화이며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감동적으로 묘사한 따뜻한 영화이자, 아름다운 음악 영화이다. 장애인 가족을 다루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지만, 인위적인 윤리나 감동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밝고 따스하다. 어린 라라가 갓 태어난 동생 귀에 대고 클라리넷을 불어 청각장애가 아님을 확인하고 환호한다거나, 어머니를 위해 TV 영화를 수화로 통역해주는 장면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이렇듯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정점을 향해 섬세하게 쌓아올려진 결과 영화의 마지막은 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참, 라라의 부모로 출연한 두 배우는 실제로 청각장애인이다. 그들로부터 진심어린 연기를 뽑아낸 감독의 이해심과 연출력에 새삼 감탄을 하게 된다.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기도 한 이 영화는 1997년 제10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정보* 제 목 : 비욘드 사일런스(Jenseits Der Stille / Beyond Silence, 독일) 감 독 : 까롤리네 링크 출 연 : 실비 테스튀, 엠마누엘 라부아, 마티아스 하비흐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 제작연도 : 1996년
"즐거운 상상력과 웃음이 가득한 학교 만들어요" 실제 학교에서도 ‘별난 교사’로 주목받아 1969년 교직 생활을 시작한 최 교장은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후 교육적이고 유머러스한 여러 편의 동화를 써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별난 국민학교〉는 당시 10만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1992년엔 ‘어린이 도서 연구회’에서 조사·발표한 ‘어린이가 좋아하는 작가’에 4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 교장은 명랑소설 이외에도 많은 동화를 발표했으며 ‘한국동화문학상’, ‘어린이가 뽑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도 초등 6학년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청국장’을 포함한 단편소설집 〈탈주범과 이발사〉를 출간했다. 동시로 등단한 최 교장이 명랑소설을 쓰게 된 것은 일기지도 시 일기장에 덧붙여준 글들을 출판사 관계자가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이자 교육관입니다.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또 어릴 적 꿈이 만화가였을 정도로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일기장에 그림을 그려 주기도 했죠. 당시에는 재밌게 써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당시 최 교장의 명랑소설은 재밌기도 했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실적인 묘사와 교육현장에 대한 풍자로 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 교장의 대표작 〈별난 국민학교〉를 보면 당시 신설학교였던 ‘별난 국민학교’에 문교부장관이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별난 국민학교장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교감과 둘이서 장관을 맞이한다. 최 교장은 “당시 학교는 상당히 권위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에 바라는 것들을 소설 내용에 포함시키곤 했었습니다”라며 웃음을 보였다. 최 교장은 실제로도 ‘별난 선생님’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수업 중 책상을 모두 교실 뒤로 밀어 놓고 아이들은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누워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화책을 보고 심지어 낮잠을 자기도 했다. 또 시장(市場)에 대한 수업 시간에는 아이들을 시장에 풀어 놓기(?)도 했다. 그런 일들 때문에 당시 학교에선 ‘골치 아픈 교사’였다고. 최 교장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자유로운 사고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답답한 교실에서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을 한다면 의미가 없어요. 자기만의 즐거운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직접 그린 만화로 학교 꾸며 최 교장의 이러한 교육관은 학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월초 교내 곳곳에는 최 교장이 직접 그린 그림들을 이용한 게시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교장실 문손잡이에도 최 교장이 직접 만든 명함이 붙어 있다. 권위주의적인 것을 거부하는 최 교장의 교장실에는 명패도 없다. “하루 종일 교장실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누구든지 한번은 웃고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신월초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월요일 아침 방송훈화 시간이다. 최 교장은 직접 그린 만화를 이용해 훈화시간을 갖는다. 시간은 3분을 넘지 않는다. 아이들이 지루해하기 때문이다. 내용은 전래동화를 각색하거나 전화예절, 식탁에서의 예절 등이다. 최 교장이 그린 만화와 원고는 학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으며 인근 학교에서 다운받아 사용하기도 한다. 최 교장이 직접 만드는 학교 신문 ‘신월소식’도 인기다. 그는 교장실 컴퓨터 앞에 ‘신월소식 편집국’ 간판을 붙이고 격주로 발행하고 있다. 특히 ‘모두 모두, 칭찬해주세요’ 코너가 인기다. 신월초 학생들은 길에서 작은 휴지를 줍거나, 10원짜리 동전이라도 발견하면 바로 교장실로 갖고 온다. 교장 선생님이 만드는 신문을 통해 칭찬받기 위해서다. 또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6학년 2학기와 5학년 1학기에 한 시간씩 수업을 한다. 6학년 학생들과는 작가로서 교과서에 실린 ‘청국장’에 대한 수업을 진행한다. 작품을 쓰게 된 배경과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시간이다. 5학년 수업은 최 교장의 또 다른 장기를 살린 ‘축구 교실’이다. 소설 〈축구 국민학교〉를 쓸 정도로 축구에 대한 사랑이 깊은 최 교장은 20대부터 축구를 꾸준히 해왔다. 축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수업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때문인지 졸업한 아이들도 종종 학교홈페이지에 ‘교장 선생님이 보고 싶다’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독서 효과 높이는 ‘윤독’ 시간 적극 활용 최 교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윤독(輪讀)’ 시간이다. 한 교실 전체가 같은 책을 읽는다. “독서가 중요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금세 잊어버린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윤독을 하면 책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독서를 싫어해도 같은 반 친구가 읽는 책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돼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장점은 덤입니다.” 신월초에는 한 반의 인원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같은 책이 담긴 윤독 바구니가 30개가 넘는다. 그는 아이들의 독서를 위해 지난 해 어린이날에는 소장했던 800여권의 책을 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최 교장은 내년에 등단 30주년 기념 동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로 등단했지만 아직 변변한 동시집이 없습니다. 학교생활의 재밌었던 경험을 동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게 끝나고 나면 명랑소설도 다시 한 번 써 봐야 할 것 같아요.” 웃을 수 있다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는 최 교장은 우리나라 교육이 ‘즐겁게 꿈꾸는 교육’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보고 시끄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즐겁게 이야기하는 중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는 후배 교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예부터 여인들은 입고 쓰고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의 여인들은 더욱 그렇다. 여름이면 꾸밈이 극대화된다. 요즘 거리에는 치장을 하지 않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렵다. 여인이나 남성이나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하여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다.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전통 노리개 우리 전통 장신구에는 비녀나 뒤꽂이와 같은 머리 꾸밈장식부터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 몸에 바로 착용하거나 노리개와 같이 옷과 함께 꾸며 자신의 마음과 멋을 표현한 것 등이 있다. 많은 장신구 중 우리나라 옛 여인들의 저고리 앞섬 위 치장치레인 노리개는 그 여인의 마음과 멋을 나타낸다. 노리개는 매듭을 이용하여 다양한 멋을 발휘하였다. 또한 외부와 단절된 유교적인 사회에서 여인들이 앞섶에 매달려 있는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심심하거나 따분한 마음을 달래는 놀이기구 역할도 있었으리라. 경기가요에는 노리개를 읊은 가사가 있다. 이별을 서러워하는 여인이 절절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인이 먼저 “한양 낭군님 날 다려가오. 나는 죽네, 나는 죽네,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하며 눈물겨워 하면, 남자는 “네 무엇을 달라느냐. 네 소원을 다 일러라. 노리개치레를 하여 주랴. 은조로통 금조로통 산호가지 밀화불수(蜜花佛手) 밀화장도 곁칼이며 삼천주(三千珠) 바둑실을 남산 더미만큼 하여나 주랴”하면, 다시 여인은 “나는 싫소, 나는 싫소, 아무 것도 나는 싫소. 금의옥식도 나는 싫소”하고 애절해 하는 정경이 경기민요 ‘방물가(方物歌)’ 가사에 나와 있다. 자기가 짓밟은 여인의 순정을 하찮게 여기며 돈이나 패물로 자신의 행동을 덮으려는 사내들에게 노리개치레는 집치레, 세간치레, 의복치레와 함께 여인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매혹적인 재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여인들의 웃옷에 단추를 비롯하여 금은보옥의 패물들을 장식하는 유습이 고려의 옛 무덤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리개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유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삼작노리개를 비롯한 격식을 차린 조선의 노리개 양식은 고려시대 유물에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이는 아마도 다른 문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 송, 원, 명의 중국 장신구 양식이 오랜 동안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쳐 오는 동안 우리 민족 정서 속에서 점진적으로 정리 순화되어 한국 삼작노리개 양식이 자리 잡혀 온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귀족이건 서민이건 기녀이건 숙녀이건 그 집안 지체에 따라 또는 처소와 예법에 따라 노리개를 가슴에 달고 다소곳이 기품을 가누곤 했다. ‘미인도(신윤복 作)’의 여인도 삼작노리개를 살포시 매만지고 있다. 한국 여인들이 마음처럼 착하고 담담한 표현을 노리개로 표현했다. 노리개는 단순한 것 같아도 그리 간단한 것만도 아니다. 행복 염원하는 여인들의 마음 담아 노리개는 한복 저고리의 겉고름, 안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여성 장신구의 일종을 말하는 것이나, 어원의 느낌으로는 놀이처럼 만질 수 있는 기구로 여겨진다. 특히 손동작이 어색할 때 살짝 팔을 올려 가만히 노리개를 만지는 여인의 하얀 손을 보면 그 어떤 모습보다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몸에 차는 패물류(佩物類)는 원래 칼, 숫돌과 같이 실제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의 습속이었는데, 이후 허리띠에 온갖 장식적인 요패(腰佩)를 단 형태로 발전하였다. 노리개는 화려하고 섬세하여 한복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한층 강조해 준다. 노리개는 모양과 형태가 다양하여 궁중에서는 물론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자들이 널리 즐겨 찼다. 그중 대삼작은 국가의 궁중의식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에 패용하였고, 단작은 평상시에 달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시대 귀부인들이 허리띠에 금탁(金鐸), 금향낭(錦香囊)을 찼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 후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띠에만 차던 것을 옷고름에도 찼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옷고름에 달았다. 국가의 궁중의식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달았고, 간단한 것은 일상 시에도 달았는데 양반계급에서는 집안에 전래(傳來)하는 노리개를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도 하였다. 지난 2월 왜장을 죽이는 데 공을 세워 논개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1592)의 초상화를 고미술품수집가 안병례(46) 씨가 조선일보에 공개했다. 공개한 이 그림은 가로 70㎝, 세로 105㎝ 정도로 일본 교토에서 최근 입수됐는데, 한지에 그린 채색화다. 옥비녀를 한 계월향은 반달 같은 눈매에 이중으로 된 옅은 눈썹, 도톰하면서도 오뚝한 코 등 전형적인 조선 미인이다. 그림에는 ‘1815년 그린 것으로, 그를 기리는 사당(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저고리 길이가 짧고 소매폭도 좁은 등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로 당대의 패션 감각을 반영한 ‘섹시한’ 느낌을 주면서도, 손을 ‘X자로 곱게 교차한 뒤 가슴에 찬 노리개에는 ‘재계(齋戒 -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라고 적어 그를 현창(顯彰)한다는 의미를 더하고 있다. 노리개는 외형상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호화로운 장식이기도 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부귀다남, 불로장생, 백사여의(百事如意) 등의 길상적인 의미나 행복을 염원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담기도 하고, 나약하지만 속 깊이 나라를 염려하는 충정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다양한 크기, 재료 등으로 독창성 뽐내 노리개는 삼작(三作), 단작(單作)으로 구분되고 띠돈[帶金], 끈목[多繪], 패물, 매듭, 술 등 5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삼작(三作)노리개는 3개의 노리개를 한 벌로 꾸민 것으로 대삼작(大三作), 중삼작(中三作), 소삼작(小三作)으로 구분한다. 대삼작노리개는 가장 호화롭고 큰 것으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했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상류계급에서, 소삼작노리개는 젊은 부녀자나 어린이들이 사용했다. 띠돈은 가장 위에 있는 고리로서 노리개를 고름에 걸게 만든 것인데, 재료에 따라 순금 또는 도금으로 만든 금삼작, 순은 또는 여기에 칠보장식을 수놓은 은삼작, 백옥을 비롯한 옥 종류로 만든 깔끔한 옥삼작, 주먹만한 밀화덩이나 산호가지 그리고 청강석이나 옥나비 중 세 가지를 곁들인 호사스러운 대삼작, 청강석 산호 밀화로 만든 불수촌이나 산호가지, 밀화덩이, 옥나비의 콤비로 된 중삼작, 비취, 자만옥, 백옥, 산호, 청강석, 밀화를 재료로 나비, 호도, 동자, 가지, 호로병, 박쥐, 투호 등을 주로 만든 약식의 소삼작 등으로 이루어진다. 모양은 정사각형, 직사각형, 원형, 화형(花形), 나비형, 사엽형(四葉形) 등과 화문(花文), 쌍희자문(雙喜字文), 용문, 불로초문 등의 길상무늬를 사용한다. 끈목은 동다회(圓多繪)를 주로 쓰는데, 띠돈과 패물, 술을 연결하며 매듭을 맺는다. 또 노리개의 주제에 따라서 박쥐삼작, 불수삼작, 동자(童子)삼작, 장도(粧刀)삼작으로 부르고, 삼작노리개가 세 가지 종류의 주제를 콤비로 해서 표현했을 경우는 동자, 바늘집-방아다리, 은삼작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단작노리개는 삼작노리개 중의 한 개를 따로 달거나, 처음부터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노리개이다. 그리고 소삼작노리개는 예장이 아닌 경우에도 달 수 있고 평상복에 쉽게 장식할 수 있는 단식노리개들, 즉 옥장도, 은장도, 또는 향낭 같은 것도 있는데 요즘 브로치나 양장의 액세서리 같은 가벼운 단장에 애용하던 것이다. 노리개의 색조는 삼색(三色)부터 12색까지 사용하였다. 삼작노리개는 홍색, 남색, 황색의 3색을 기본으로 썼고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옥색 등을 쓰기도 하였다. 노리개의 위쪽에 다양한 매듭이 있는 부분은 짧은 저고리의 길이와 비례하고, 길게 드리운 술 부분은 긴 치마의 길이와 같은 비례로 하여 만들었다. 노리개의 색조는 주로 매듭노리개에서 다양한 색상을 볼 수 있다. 매듭노리개의 매듭은 명주실을 꼬고 합사(合絲)하여, 각색으로 염색해서 끈목을 친 다음, 굵고 가느다란 끈목을 늘어뜨려 각종 모양으로 맺는 공예기법이다. 노리개의 긴 삼색줄은 짧은 저고리에 긴 치마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같은 모양으로 엮은 매듭에 색상과 형태가 다른 보석 세 개를 청, 홍, 황의 세 줄에 꿴 대삼작노리개는 대례복에 찼다. 같은 모양이면서도 크기가 비교적 작은 것은 소삼작이라 부르며 소례복에 사용하였다. 노리개를 만든 옛 장인들은 크기, 개수, 모양을 자유자재로 구상하고 만들면서 어떤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인지를 찾고 또 찾아 노리개에서 극치미를 맛보았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재료는 재료대로 모양은 모양대로 크기는 크기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모양을 다섯 요소를 채워가며 독창적으로 만들어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 노리개를 만드는 장인은 화려하고 섬세한 손재간을 한껏 뽐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 장소, 직위에 맞는 노리개 착용 노리개는 거기에 달리는 패물의 종류나 규모에 따라 예복용과 평복용으로 구분되고, 크기나 모양에 따라 어른용과 어린이용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다. 대례복에 차는 대삼작노리개에는 손바닥 크기가 넘는 산호가지와 백옥나비 위에 진주, 청강석(靑剛石), 산호 등의 구슬을 배열하여 금속 세공을 한 나비 한 쌍, 주먹만한 밀화불수(蜜花佛手)를 달아서 진귀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궁중에서는 철에 따라 5월 단오절부터는 백옥, 비취로 된 외줄노리개를 달고, 8월 추석부터는 삼작노리개를 달았다고 한다. 가례, 탄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귀부인들까지 삼작노리개를 달았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전에 문후를 드릴 때는 금박 스란치마에 당의(唐衣)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달았다고 한다. 또 왕비만이 달 수 있었다는 삼천주(三千珠)노리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상징하는 것으로 큰 진주를 3개씩 꿰었다고 한다. 소삼작이나 외줄 노리개는 소녀용으로 분홍, 연두, 노랑색으로 하거나 색동으로 만들었다. 도리매듭, 국화매듭, 가지방석매듭 등을 맺고 봉술, 딸기술을 쌍으로 늘였으며, 패물로는 동자(童子), 탑, 가지, 도끼, 방울, 나비, 주머니, 오리, 호리병, 고추 모양의 금속 세공품에 금을 올리거나 칠보를 올려 작은 은고리에 끼었다. 민간에서는 주로 은삼작을 달았는데, 혼례 때 사용한 후 백지에 싸고, 비단보에 싸서 보물상자에 간직해 두었다가 친척의 혼례 때나 꺼내 썼다고 한다. 방아다리, 장도(粧刀), 투호(投壺), 박쥐, 나비, 호리병 등의 모양을 은으로 세공하여 달았다. 뜨거운 속내 감추는 은근한 아름다움 우리나라 여인들의 가슴에 달린 노리개들은 경우와 처소에 따라 하나의 예장구실을 했지만 그 노리개들의 격조나 취미를 살펴보면 그 집안의 가도나 그 여인의 교양이 드러나 보였다. 마치 요새 저고리 적삼에 다는 브로치의 선택이 그 여인의 인품을 드러내는 경우와 다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상류면 상류대로 화사한 노리개를 자랑삼기도 했고, 서민은 서민대로 수수한 은삼작에 아롱지는 칠보무늬로 조촐한 아취를 표현해서 여인 풍정을 돋보이게 했다. 말하자면 조선의 노리개는 무슨 권위나 호사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다양하고 복잡하면서도 주제가 통일되어 있고 화사하고 뽐내는 듯해도 한국의 어진 어머니들처럼 은근하면서도 포근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여인들이 자신을 꾸미는 일은 거의 본능적이다. 현대 여인들은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장신구를 개발하여 많이 그리고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 옛 여인들이 뜨거운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앞자락에 간접적으로 표현한 노리개의 아름다움은 기지와 재치를 가진 한국 여인의 은근한 아름다움이다.
바닷가의 거대한 모래언덕 사구(砂丘) 거대한 모래언덕, 황량한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에 올라서면 바람에 날린 모래가 한치 앞을 보지 못하게 눈을 때리고, 묵직한 신발은 모래 속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 그냥 걷기도 힘이 든다. ‘이런 곳에 생명이 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지만, 봄이 찾아오면 다양한 식물들이 싹을 틔워 초록의 세상을 만든다. 이때부터 모래언덕은 바다와 더욱 진한 앙상블을 이루면서 이곳을 찾아오는 생명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사구는 해안이나 사막에서 바람에 의해 운반·퇴적되어 이루어진 모래 언덕을 말한다. 만들어진 곳에 따라 해안가의 모래에 의한 해안사구, 사막과 황무지 같이 건조한 내륙에서 만들어지는 내륙사구, 거대한 호숫가의 호반사구, 강가의 모래에 의한 하반사구가 있다. 이들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여러 모양과 크기를 보이고, 어떤 경우에는 서서히 이동하기도 한다. 이 중 우리나라에는 강가의 모래에 의한 하반사구와 강 또는 육지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와 쌓인 모래언덕인 해안사구가 나타난다. 하반사구는 낙동강에 주로 분포하고, 해안사구는 모래 해수욕장에서 나타나는데, 대부분이 파괴되고 크게 알려진 주요 사구에는 신두리, 학암포, 구례포, 만리포, 연포, 몽산포, 청포대, 마검포, 삼봉, 기지포 등이 있다. 또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제주도의 중문해수욕장이나 동해안의 경포해수욕장, 포항의 형산강, 송정해수욕장 등이 있다. 해안사구는 바닷물과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해류에 의해 사빈(해수욕장)으로 운반된 모래가 계속적인 파랑에 의해 밀려 올려지고, 밀려온 모래는 바람에 의해 낮은 언덕 모양으로 쌓여 사구를 만든다. 이런 사구는 주변의 지형, 모래 공급량 및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해안사구는 육지와 바다 사이의 퇴적물을 조절하여 해안을 보호하고, 해안과 내륙의 생태계를 이어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 이런 완충 지역의 지형과 식생은 특이한데, 모래언덕의 바람자국은 사막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경관을 나타낸다. 또 이곳에는 독특한 식생이 발달하여 여러 종류의 사초류가 번성하고, 모래지치나 해당화의 군락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폭풍과 해일로부터 해안선과 농경지를 보호하고, 지하수를 품었다가 뿜어 올려 해안가의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며, 사구에 의한 반달형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만들어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한다. 최대 규모로 학술적 가치 높아 모래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제주도의 중문해수욕장이다.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끊임없이 모래를 싣고 와 만든 것이 중문의 모래언덕이다. 계속된 모래언덕의 파괴로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고개를 뒤로 활짝 제쳐야 보일 만큼 높다. 남해안과 동해안의 사구는 파도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끊임없는 파랑에 의해 모래가 공급되고 모래의 쌓임에 의해 아름다운 해빈과 사구가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서해안의 모래언덕은 파도의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 바람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우리나라 해안사구의 전형적인 모습은 약 1만 5천 년 전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두리사구에서 찾을 수 있다. 태안반도 북서부의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사구는 해변을 따라 길이 3.4㎞, 너비 0.5~1.3㎞이다. 사구의 모습이 그런대로 보존된 북쪽의 일부 지역이 2001년 11월에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곳은 신두리 해안의 만입부에 있는 사빈의 배후에 분포하는데, 인접 해역은 모래로 구성되어 있다. 물이 빠지면 넓은 모래갯벌과 해빈이 드러나는데, 해빈의 길이는 3㎞, 폭은 200m이다. 겨울철에 강한 북서풍이 불어오고 이 북서풍에 의해 모래가 갯벌과 해변에서 육지로 이동되어 사구를 더욱 살찌게 한다. 이런 지형적인 장점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구를 만들 수 있었다.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로서 사구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전사구, 초승달 모양의 사구인 바르한, 사구습지 등 다양한 지형들이 발달되어, 이를 통해 사구의 형성과정과 과거의 환경을 밝힐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지역의 사구와 마찬가지로 신두리사구도 개발로 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역에도 펜션이 위치하고 차량과 오프로드용으로 이용되는 도로가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출입하면서 계속적인 파괴를 하고 있다. 몇 해 전에는 신두리 앞바다와 맞닿는 남쪽 의항리에 방조제를 쌓았는데, 초봄을 제외하고는 모래바람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북서풍이 의항방조제에 막히면서 만리포로 방향을 틀어 모래가 만리포 백사장 뒤쪽 제방 위까지 날아와 큰 피해를 주고 있다고 한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의 식물 볼 수 있어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신두리사구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가장 번성을 이루는 식물에는 통보리사초, 갯보리, 해당화, 띠, 모래지치, 산조풀, 순비기나무 등이고, 그 외에도 갯쇠보리, 수송나물, 갯메꽃, 달맞이꽃, 갯방풍, 개사철쑥, 서양민들레, 수크령, 눈갯버들, 땅비수리, 등갈퀴나물, 쌀새, 갯완두, 포아풀, 떡쑥 등이 자라고 있다. 사구 내에도 비가 오면 습지가 만들어지는데, 이곳에는 개여뀌, 솔방울고랭이, 쉽사리, 털부처꽃, 물억새 등이 자란다. 방조제 건설로 모래 공급이 잘 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사구는 스스로 모래를 간직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자신의 넓은 가슴을 아무런 요구 없이 뿌리를 서로 뭉쳐서 자라는 식물들에게 내주었다. 모래언덕의 모래를 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식물에는 해당화, 순비기나무 같은 관목과 통보리사초, 갯보리, 갯쇠보리, 수송나물, 갯메꽃, 모래지치 등의 초본이 있다. 특히 순비기나무는 해수욕장의 모래를 길게 뻗은 여러 가닥의 뿌리로 단단하게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꽃은 여름에 자주색으로 핀다. 중요한 해변 식물인 순비기나무는 모래 해변뿐만 아니라 자갈이나 몽돌 해변에서도 잘 자란다. 사구의 상단부에는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그 주변에는 아카시나무와 버드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사구 식물이 번성을 누리면서 표범장지뱀, 맹꽁이, 쇠똥구리, 아무르산개구리, 참개구리, 무자치와 여러 종류의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특히 참새목의 종다리가 모래언덕에서 가장 활기차게 생활하고, 그 외에도 사구습지에는 멸종위기종인 금개구리가 살고 있다. 가을이면 식물들이 생기를 잃어버려 황색의 벌판으로 변하는데, 이는 모래가 섞인 겨울바람을 이겨내기 위한 이곳 식물들의 생존 방법이다. 넓은 사구의 절반이 사람들이 만든 도로에 의해 나누어지고, 계속적으로 세워지는 건물은 생물들의 보금자리를 훼손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구 부분에도 도로가 닦여 있어 도로를 이용한 탐방은 가능하다. 해수욕장 주변에 차를 주차하고 검문소를 지나 한 발자국만 들어가면 더 넓은 모래언덕을 만나게 된다. 모래언덕 사이를 천천히 걸어 끝까지 가게 되면 약 2시간이 걸리고, 돌아올 때는 해수욕장을 이용하여 걸으면 된다. 사구의 모래는 물기가 거의 없어 걷기가 힘이 들지만 해빈(海濱)의 모래는 물기를 촉촉이 머금고 있어 차가 달려도 바퀴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철 이른 해수욕 시즌에 철없는 사람들이 해빈 위를 자동차로 질주하기도 한다. 그들의 광란의 질주는 모래만 눈에 보이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생명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유일한 사구습지로 다양한 생물 서식 사구습지는 사구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습지를 지칭하는 말이나, 항상 물이 고여 있어 호수의 형태를 보이는 곳은 단 하나 두웅습지 뿐이다. 두웅습지는 일반 습지와는 달리 호수의 밑바닥이 모래로 이루어져 있고, 바닷가임에도 바닷물이 침투되지 않는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 이곳에 모래언덕이 만들어지고 육지에서 바다로 흘려가던 빗물은 웅덩이에 모이기 시작한다. 이때는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섞여 일종의 석호를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모래가 쌓여 사구의 넓이는 더욱 넓어지고 웅덩이에는 더 이상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호수가 두웅습지이다. 이곳에는 환경부 보호종인 금개구리와 맹꽁이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고, 그 주변에는 사구식물인 갯메꽃, 순비기나무 등 12종의 식물이 분포하여 보전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래서 사구습지로는 처음으로 이곳 일대 65,000㎡를 2002년에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국제적으로 멸종 위기에 놓인 노랑부리백로(천연기념물 361호)와 물속의 폭군곤충인 물장군, 이끼도롱뇽 등이 발견되어 그 값어치를 더하고 있다. 이끼도롱뇽은 2003년 대전 장태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신종으로 보고된 희귀종이고, 물장군은 멸종 위기에 놓인 종이다. 두웅습지를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게 한 금개구리의 등은 밝은 녹색이고, 등의 옆줄에 있는 융기선은 연한 갈색이며, 배는 누런빛을 가진 붉은색으로 보인다. 암수 모두에게 울음주머니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양서류 중에서 맹꽁이와 함께 유일하게 법으로 보호받는 특산 희귀종이다. 두웅습지가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사구습지의 대명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물속에는 민물새우, 도롱뇽, 맹꽁이, 금개구리, 붕어, 가물치가 살고 있고, 이를 먹이로 하는 새들도 호수를 찾고 있다.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 습지의 불청객인 붉은귀거북과 황소개구리가 이곳에서 다량 번식되고 있다. 이들을 철저하게 방제하고 있지만, 그들의 숫자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희귀종인 맹꽁이와 금개구리의 산란 장소이기 때문이다. 두웅습지는 주변에 농경지가 적어 사람의 간섭은 적게 받으나 외래종의 침입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계속적으로 관리인이 황소개구리와 붉은귀거북을 포획하고 있으나 최상의 포식자를 이룬 이들이 쉽게 근절될지는 의문이다. 습지를 천천히 걸어 한 바퀴 도는데 10분이 걸리는데, 습지의 중간에는 수련이 자라고, 그 주변에는 달뿌리풀과 부들이 자라고 있다. 특히 수련 주위에서 놀고 있는 금개구리를 만난다면 더욱 호수는 황금색으로 빛날 것이다. 신두리 주변의 문화와 이야기 신두리를 품고 있는 태안반도는 태안군, 서산시, 예산군, 당진군에 속하며, 만과 반도가 많아 해안선이 복잡하고 몽산포, 연포, 만리포, 천리포 같은 해수욕장이 구석구석에 분포한다. 이곳은 리아스식 해안뿐만 아니라 해안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1978년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기에 모두를 통틀어 태안반도라고 부른다. 태안반도의 절반을 차지하는 곳이 안면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이곳은 조선시대에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섬의 일부를 절단하였으나 지금은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의 자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단일 소나무숲으로 세계 최대인 자연휴양림을 가지고 있다. 안면도의 소나무는 쭉쭉 자라 모양이 좋기에 특별히 안면송이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궁중의 궁재나 배를 건조할 때 이용하였다. 또 안면도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인 매화마름도 자라고 있다. 소나무로 이루어진 자연휴양림이 자연미를 가졌다면, ‘천리포수목원’은 인공미를 지닌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故 민병갈(1979년 귀화한 Carl Ferris Miller) 수목원장이 개인 기금을 조성하여 세웠다. 천리포수목원은 7개 지역으로 나눈 다음 세계 각 지역의 토질, 기후, 기존 식물상 등에 따라 종류별로 적절히 배치하여 관리되고 있다. 신두리사구 가까이에는 이름이 특이한 해수욕장이 있는데,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일리포 등이다. 이 중 만리포가 가장 크지만, 실제 크기는 2.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크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해빈들이 순서대로 모여 있기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예전에는 버려진 땅으로 여긴 해빈과 사구!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에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모래언덕은 필요 없는 땅이었다. 그렇지만 모래언덕은 해안과 내륙 생태계를 이어주는 완충 역할을 하면서 폭풍과 해일로부터 해안선과 농경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묵묵히 해왔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마음의 안식과 휴양은 어떤 보약보다도 몸을 편안하고 튼튼하게 한다. 넓은 반달형의 해빈과 사구, 갈매기 나는 석양의 모습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편안을 주기에 태안팔경 중 하나로 친다. 특히 사구 깊숙이 숨겨진 두웅습지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삭막한 세상에도 희망의 옹달샘이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Q1. 특별활동 각 영역별 활동은 순서대로 모두 지도해야 하나요? A1. 교육과정에 제시된 각 영역의 활동 내용(5개 영역, 25개 활동)은 ‘예시적 기준’입니다. 따라서 단위학교는 지역 및 학교 실정을 고려해 각 영역별 이수시간(단위)을 배당하고, 지도내용을 재량으로 선정하여 편성함으로써 당해학교의 창의적인 특별활동 교육과정을 편성해야 합니다. 다만 학교는 특별활동의 각 영역이 균형 있게 운영되도록 노력하고 각 학교별로 특색 있는 중점영역을 설정·육성함으로써 학교의 전통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Q2. 특별활동 시간은 매주 정해진 시간에만 운영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2. 특별활동의 시간 운영은 고정된 시간표에 의한 획일적이고 경직화된 운영이 아니라, 활동영역·활동주제·활동내용·운영방식 등에 따라 학교실정을 고려해 다양하게 운영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매주 지정된 요일과 시간을 정해 실시하는 정일제, 격주로 시간을 연속해 운영하는 격주제, 4주 이상의 시간을 모아 하루에 실시하는 전일제, 특정 계절에 연속 실시하는 집중이수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Q3. 특별활동 시간을 분할하거나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A3. 특별활동 시간 운영에 있어 1시간(초등 40분, 중등 45분, 고등 50분)을 단위로 획일적으로 운영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 20분, 30분 등으로 나눠 분할하거나 80분, 100분 등으로 통합하여 운영(block scheduling)하는 방안도 허용됩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통합하거나 분할하여 융통성 있게 운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의 분할·통합은 활동 주제에 따라 결정돼야 하며, 특별활동의 연간 누적시수가 준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 창의성 계발을 위한 교수·학습방법을 논하시오. 논점 구성방안 본 문제의 중요 논점은 창의성 계발을 위한 교수·학습방법인데 논리적인 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관련 논점을 언급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론에 창의성의 특성을 논하고 창의성 계발방법을 논해 주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창의성 계발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시하고, 창의성 계발방법을 논해주는 것이 설득력 있는 답안이 될 것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전자의 논점(창의성의 특성 + 창의성 계발방법)에 따라 논리를 전개할 때와 후자의 논점(창의성 계발 저해요인 + 창의성 계발방법)으로 논리를 전개할 때 서론의 문제제기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전자에 따라 답안을 작성할 때는 서론에서 창의성의 개념과 시대상황에 비추어 창의성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고, 본론에서는 창의성의 특성이 무엇이고, 이를 계발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이라는 방식으로 답안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반면, 후자에 따라 답안을 작성할 때는 서론에서 ‘창의성의 개념과 특성 그리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교육되지 못하고 있다’로 시작한 후 본론에서는 학교현장에서 창의성 계발 수업이 잘 되지 못하는 원인, 이에 대한 방안으로서의 창의성 계발 방안이 제시되면 설득력 있는 답안이 될 것이다. 논술의 목적은 설득과 공감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논리전개, 표현된 내용, 표현방식 등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예시답안 1. 서론 21세기는 창의성의 시대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최첨단의 기술을 생산·가공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이른바 ‘창의적인 인간’이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이 경쟁력 있는 지식과 문화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고,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국가의 인적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식의 산실인 학교는 산업화시대에 적합한 획일적인 교육방법에서 학생들의 다양성과 개성이 발현될 수 있는 교수·방법으로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2. 본론 창의성이란 지적·정의적 특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써 ‘무엇인가 특이하고 새로우며 독특한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특성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문제들을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 어떤 문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빠르고 거침없이 내어놓는 유창성, 어떤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상식을 벗어난 엉뚱한 생각을 해내는 능력인 융통성(유연성)은 물론 어떤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신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사에 자발적이고 독창적이며 항상 주변의 것에 관심과 의문을 가지는 호기심과 끈질기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집착성이 있다. 이러한 학생들이 개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이러한 학생들을 발굴해 내는 터전이 되어야 한다. 먼저 교사는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관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지능의 다원성이론에 따라 학생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은 물론 개방적이고 허용적인 분위기를 조장함으로써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의사를 표현하도록 한다. 또 프로젝트 학습이나 웹기반 학습전략을 통해 스스로 선택한 학습 과제와 방법에 따라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학습의욕을 고취시키고 이 과정에서 자발성과 집착력이 배양되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창의성 계발 발문과 기법을 통해 창의성을 함양한다. 교사는 다양한 사고를 유도하는 확산적 발문을 하고, 허용적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대답과 표현들을 수용하고 적절한 칭찬을 해 줌으로써 유연한 사고를 갖도록 한다. 동시에 수업 중 브레인스토밍기법 등 창의성 신장기법이나 탐구학습 및 문제해결학습법을 활용함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끝으로 교사 스스로가 창의적인 모델이 되어야 한다. 교사의 창의적 행동 속에서 학생들은 창의적 행동을 습관화하기 용이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일상적인 일에서도 늘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수업에서도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도서관이나 지역사회의 문화 시설 등에서 폭넓은 학습경험을 갖도록 해야 한다. 3. 결론 21세기는 세계화, 정보화, 다양화 사회로 창의적인 지식을 얼마나 재생산해 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 능력이다. 이러한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교육환경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을 통해 개발할 수 있다. 따라서 교사는 개방적이고 허용적인 분위기 조성,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나 창의성 계발 기법, 창의적 모델 제시 등을 활용해야 한다. 수준 높은 창의성 교육으로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발굴을 위해 교사의 연구와 자기개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보충자료 1. 창의성의 개념 및 중요성 가. 개념 창의성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나 참신한 통찰들을 산출하는 능력, 독창적으로 고정된 인습을 깨뜨리는 것, 자연스러운 변화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는 어떤 비범하고 진기한 것을 내어 놓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창의성 교육의 중요성 창의적인 사람은 발명을 하거나 아이디어를 창안하여 사회에 기여한다는 직접적이고 생산적인 면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비정형적으로 변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며, 무한경쟁의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2. 창의력의 구성 요소 창의성의 구성요소에는 유창성, 유연성, 독특성 등이 있다. 유창성은 어떤 문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빠르고 거침없이 내어놓는 능력을 말한다. 융통성(유연성)은 어떤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상식을 벗어난 엉뚱한 생각을 해내는 능력을 말하며, 독창성(독특성)은 어떤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신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3. 창의적 사고의 성향 창의력 사고의 성향은 인간의 내적 특성으로서의 창의적 사고기능이 최종적인 인간의 성취를 위해 작용하는 과정에서 개인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가. 자발성은 문제 상황에서 아이디어를 자발적으로 산출하려는 성향이나 태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접근할 때 창의적 사고가 이루어진다. 나. 독자성은 자신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구애받지 않으려는 성향이나 태도이다. 다. 집착성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성향이다. 라. 호기심은 항상 생동감 있게 주변의 사물에 대해 의문을 갖고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하려는 성향이다. 마. 정직성은 자신이 관찰한 것과 생각한 것을 꾸밈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4. 창의성 교육을 위한 학교교육의 방향 가. 창의적인 사고능력을 키울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강화 - 창의성은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와 같은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은 아니다. 창의성은 훈련이나 학습에 의해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융통성 있는 사고와 독창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 나. 창의성 개발에 적절한 분위기의 조성 - 도전할 수 있는 분위기, 자유롭고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 유머가 풍부하고 모험심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 서로 토론하는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인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다. 다. 교사가 창의적인 모델이 되라 - 창의적인 교사의 행동 속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보다 쉽게 창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일상적인 일에서도 교사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줘라. 라. 개인차를 고려한 개성화 교육의 강화 - 어떤 아이가 잘하는 능력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능력을 잘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그 방면에서의 전문가가 되도록 하는 특성화 교육이 필요하다. 마. 확산적 사고력 교육의 강화 - 학교의 수업방식이나 교육방침이 어떤 하나의 정답을 알아맞히는 식의 수렴적인 교육보다는 여러 가능한 정답을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확산적인 사고력 교육이 필요하다. 바. 높은 정서지능을 기를 수 있는 교육 -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강한 의지력과 지구력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를 위한 높은 정서지능을 갖추어야 한다. 5. 창의력 신장 교육의 이해 가. 학교교육에서 창의력 교육의 필요성 미래는 다양하고 다원화된 정보가 범람하는 사회이므로 정보를 창출하거나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여 빠르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창의적 능력을 가진 인간을 요구한다. 창의력은 심리적 안정감의 환경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을 통해서 개발될 수 있다. 물론 개인별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학교교육을 통해서 꾸준히 노력하여 어린이들의 무한한 창의력 신장을 지도해야 할 과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 학교에서의 창의력 개발 방안 학교에서 어린이들의 창의력을 개발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의지와 철학이 중요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학습여건이 미비하고 아동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지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보다 효과적인 창의력 신장 교육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면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1) 분위기가 중요하다. -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를 북돋아 주는 교사의 노력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시간을 부여하는 배려, 어린이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는 자세, 그리고 이들의 상상력을 키우기 위한 학습주제 선정 및 편성 등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2) 어린이의 기(氣)를 살려야 한다. - 어린이들의 기를 살린다는 것에 대한 교사들의 비판도 만만치가 않다. 너무 질서가 없고, 자기주장만 하고,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며, 교사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요즘 어린이들을 가르치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교사들의 어려움을 자주 듣는다. 이 같은 어린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교육현장은 어린이들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키워 나가게 하며 바른 인성교육과 창의력 교육을 조화롭게 지도해야 할 것이다. 6. 창의력 신장을 위한 지도방안 창의력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힘은 교육을 통해서만 신장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창의력 신장을 위한 지도방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가. 문제의식을 길러 주어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저 무심코 지나치고 있는 것 중에서 훌륭한 창조가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나.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충분한 지식이 머리에 들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새로운 것들을 탐구하여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자꾸 만들어냄으로써 보통사람이 보면 그야말로 엉뚱한 생각을 해내는 사람, 즉 생각해 내는 힘을 길러 주어야 한다. 다. 고정관념을 버리도록 한다. 고정관념에서 생각하면 편하고 위험도 적지만 도약이나 발전 그리고 자유분방한 아이디어를 따를 수 없다. 학생들은 호기심이 강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강하다. 따라서 고정관념이나 생각으로 학생들의 생각을 꺾지 않으면 창의성을 기를 수 없다.
전문직 준비를 위한 마음가짐 교육경력 15년! 누가 보더라도 외형적인 조건만으로는 충분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경력이다. 흔히 교사를 전문직이라고 하는데 ‘내가 과연 전문가로서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그만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들에 대한 회의와 반성과 뭔가 창조적이거나 생산적인 일을 찾고 싶어졌다. 유년시절 철없이 뛰놀던 개구쟁이, 코흘리개 녀석들도 이제 의젓한 사회의 중견 간부로서 각자의 역할과 일에 대한 열성을 쏟아 붓고 있고, 제법 생각이 열린 고교 동창들은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인의 영달이 한동안 뇌리를 무겁게 짓누르며 번뇌를 지속하게 하였다. 어떤 분야에서 15년의 경력이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교육계에도 정말 훌륭한 선배님, 동료, 후배들이 많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먼저, 지난 몇 년간 시·도 및 지역교육청의 업무를 도와주면서 만난 장학사, 선배들을 만나 자문을 구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전문직 준비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엄청난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정확히 2006년도 전문직 합격자 발표한 지 한 달 후였다. 전문직 시험 준비 계획 합격자 선배님을 만나 뵙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계획만 세웠다. 다음 날도 연월 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은 교육학을 12월까지 집중적으로 보고 12월 겨울방학부터 논술, 기획 분야 기초다지기를 하기로 하고 일과 계획은 학교와 집(독서실)으로 나누어서 세웠다. 그리고 교육학 책은 예전 대학원 석사 때 보던 교육학개론과 방송통신대 교재를 참고하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막상 공부를 하다 보니 빨리 전체를 독파하고 싶은 유혹 때문에 잘 정리된 임용고사 준비용 교육학 책을 주문해서 다시 보았다. 여기서 느낀 것은 교육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어있으면 일단 전체를 빨리 한번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걸리는 시간도 체크하고 어느 부분이 이해가 잘 되고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이 충분한 사람은 천천히 교육학 각론부터 읽으면서 이해를 해나가는 것이 가장 정석의 방법이겠다. 필자는 12월까지 교육학을 완전 독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전문직 출제경향을 분석했다. 분석해 본 결과 교육학에 대한 문제가 기본적으로 정형화 된 문제가 아니라 아주 난해하면서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철저히 이해 위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또 시간계획은 주중에 학교 근무하고 개인적인 일들이 많아 집중하기가 어려워 주말을 집중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분야별 공부 방법 공부 방법은 각자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기의 스타일을 찾아서 끝까지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필자가 공부한 경험을 소개한다. 가. 전반적인 내용 - 시간 활용 어차피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다.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본인의 몫에 달렸다. 일단은 생활을 단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공·사적으로 교육청일 돕는 시간, 개인적 일을 거의 대부분을 줄여 시간을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퇴근 후에는 핸드폰을 거의 꺼놓고 나중에 확인만 하고 중요한 일은 연락해서 처리하는 등 시간을 확보하도록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까지 : 공부하면서 요약 정리한 내용을 포스트잇에 기록하여 주로 식탁 모서리, 욕실 거울에 붙이고 밥 먹으면서 보고, 칫솔질(1회 3분씩 1일 2회, 10일이면 60분)할 때 한 번씩 보는 습관을 길렀다. 출근하면서 차안에서 : 핸드폰에 MP3 교육학강의를 다운받아 들었다. 시험이 임박한 4 ~ 5월부터는 포스트잇에 논술, 기획 1문제씩 요점정리해서 운전대에 붙여 틈틈이 정리했다. 출근해서 수업 전까지 : 2006년에는 학급담임이라 일찍 출근해서 약 1시간 동안 교육학 및 사자성어, 교육법 등을 읽었다. 떠드는 애들은 운동장으로 보내고 조용한 애들은 함께 독서했다. 2007년에는 교과전담이라 공부할 장소가 없어서 학부모상담실 구석에 앉아서 약 1시간 정도 정리했다. 쉬는 시간 : 담임을 맡았을 때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교육법, 사자성어를 펼쳐보기라도 했다. 하지만 교과전담은 시간과 장소가 부족해 장애인 화장실을 찾았다. 여기서 7 ~ 8분 정도 보는 재미가 짭짤했다. 주로 공부한 내용 정리한 수첩과 노트, 메모 중심으로 복습 또 복습했다. 오후 시간 : 지난해에는 교실에 혼자 있어 여건은 좋았는데 학급 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대학원 박사과정 수업 때문에 시간내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학년 분위기가 너무 좋아 동료교사들이 학년 일을 많이 도와줘 스트레스는 없었다. 또 학년 회식, 집들이, 기타 협의회 시간들도 가능한 모두 참석하여 낙오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분위기가 좋으니 공부도 잘되는 것 같았다. 퇴근 후 :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마찬가지겠지만 퇴근 후의 시간활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일단 퇴근하자마자 간단하게 먹을 것을 좀 챙겨먹고 잠시 소화시키면서 신문이나 정리한 노트를 좀 보다가 8시까지 잠을 잤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피곤한 육신을 침대에 좀 맡기고 8시 30분경에 책상 앞에 앉았다. 약 2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고 나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듯했다. 나중에 12시쯤 지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한숨 들이쉬면 졸음도 없어지고 정신이 더 맑아져 집중하기에 좋았다. 12시가 넘어가면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침대에 누워서 그날 공부한 내용 다시 한 번 읊조리며 잠을 청한다. 나중에는 3 ~ 4시까지도 견딜 수 있었다. 대신 다음날 점심 식사 후 약 10 ~ 20분 정도 눈을 붙이면 컨디션이 조절되었다. 주로 교육학을 정독하면서 이해 위주로 진행했고 나중에는 문제집으로 되풀이하면서 반복했다. 끝까지 자만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니 교육학에 자신이 좀 생겼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고득점을 해야 겨우 합격할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교육학을 샅샅이 뒤졌다.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시험문제가 출제가 될 만한 내용이다. 이렇게 난해한 부분은 좀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시험 출제는 바로 이런 부분을 출제하기 때문이다. 건강관리 : 공부하면서 특별히 건강관리에 대해 크게 신경을 못 썼는데, 마지막에 정말 너무나 소중한 경험을 해서 몇 자 적어본다. 시험을 5일 앞두고 주말에 갑자기 몸살기운과 함께 심한 어지럼증으로 응급실에 갔다. 뚜렷한 병세는 없이 일시적인 긴장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2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누워서 쉬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출근길에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고 기운이 없어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시험 준비하면서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시험 한 달 전부터는 철저히 컨디션 조절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평상시의 생활을 시험을 보는 오전9시 ~ 12시 정도에 최상의 컨디션과 두뇌회전이 될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맞춰 줄 필요가 있겠다. 시험 준비 Tip : 기획과 논술에 사용할 펜도 미리 구입하여 그걸로 충분히 연습하고 연습종이도 미리 만들어서 실전대비용으로 써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시간조절 역시 중요한 요소이다. 논술, 기획 시험은 정말 마지막 1초가 아까울 정도로 촉박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절대 필요 없다. 시간 조절이 꼭 필요하고 연습해둬야 한다. 교육학 문제는 단답형 주관식부터 훑어보고 객관식도 모르는 것은 일단 뛰어넘고 확실하게 아는 것부터 챙겨야 된다. 결국 나중에는 보기 5개 중 2개를 가지고 순간의 판단력으로 답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도 교육학은 비교적 시간배분이 안정적이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문제를 정확하게 읽고 해석해야 한다. 적어도 2 ~ 3번은 읽어보고 답을 골라야 한다. 문제 속에 함정이 분명히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하는 시험이다. 그리고 1교시가 끝나면 마음의 준비를 차분하게 하고 논술 시험은 점수배점이 큰 문제부터 논술한다. 먼저 문제를 충분히 읽고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개요를 작성한다. 5 ~ 10분 이상 지체되면 안 된다. 개요가 작성되었으면 곧바로 쭉쭉 써내려가야 한다. 이제는 펜과 손가락의 움직임에 운명을 맡기고 과감하게 써내려간다. 글씨는 힘 있고 깨끗하면 금상첨화다. 좋은 펜을 골라야 한다. 기획 시험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충분히 분석한 후 창의적인 작은 주제 4~5개 정도의 개요를 신속하게 작성해야 한다. 그런 후에 개요에 맞는 내용을 중심으로 논리적, 일관성 있게 기술하면서 전체적인 틀에 맞춰나가야 한다. 세부적인 것들은 내용보다 형식이고 배점이 별로 크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계획에 치중해서 작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획과 논술은 정말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간조절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나. 분야별 시험 준비 경기도 출제 경향 :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교육학은 그야말로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라고 보면 된다. ‘교육학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떨어뜨려야 할 문제를 만들까’라는 데 초점을 두는 것 같다. 교육학 문제를 풀고 나서 가장 먼저 ‘문제를 풀기 위해 공부한 수험생도 힘들고 어렵지만 문제를 출제한 출제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문제를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출문제를 분석해보면 어떤 정형화된 출제경향은 없다. 굳이 언급한다면 현장에서 교육, 수업, 생활지도 하면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기 때문에 교육학은 철저한 이해중심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음으로 논술, 기획, 면접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기출문제를 열심히 분석해보고 경향을 추정해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그래도 시사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고 경기교육의 큰 흐름과 맥락, 강조점, 철학, 당위성 등을 평소에 눈여겨 살펴봐 둬야 한다. 한마디로 정형화된 출제경향은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런 걸 믿었다간 낭패 볼 수가 있다. 철저히 자기가 준비해가면서 경향을 만들어가야 한다. 정점에 오르면 맞출 수는 없지만 흐름이나 강조점, 분위기, 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게 바로 출제경향이다. 교육학 : 먼저 교육학을 2회 정도 독파하였다. 중간에 다른 책도 사서 부분적으로 참고했다. 가능한 최신 교재를 보는 것이 좋겠다. 최소한 저자가 다른 2권의 교육학 종합책을 엇갈리게 봐야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각 분야별로 유명한 저자의 개론서를 바탕으로 먼저 이해하고 정리된 종합서를 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교육학은 철저한 이해를 중심으로 집중하고 반복해서 저절로 머릿속에 외워지도록 공부하는 것이 좋다. 무의미하게 그냥 외우는 것보다는 먼저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반복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되어 응용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문제집을 사서 풀어보면 어느 정도 교육학이 정리되었는지 스스로 체크해보고 부족한 부분은 다시 한 번 이론서를 훑어보고 그 문제만 나중에 다시 한 번 풀어보는 것이 좋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 강의를 한번쯤 들어보는 것도 좋다. 방학 동안 한국교육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전문직 특강은 전반적으로 정리하기에 아주 좋은 강의였다. 그때쯤이면 교육학이 어느 정도 수준에 있고 이것을 다시 한 번 객관적으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하거나 잘 외워지지 않는 부분은 쪽지나 수첩에 메모해서 틈틈이 눈으로 읽혀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교직실무 : 실무는 필자에게 무척 어려운 분야였다. 그냥 책을 통해 이해하는 것하고 막상 문제를 풀기 위해 알아야하는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합격한 선배님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2월에 한국교육신문사의 실무 강의를 들었다. 그동안 고민했던 부분이 너무도 시원하게 풀렸다. 전직 교장선생님이 사례별로 조목조목 풀어주는데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사실 교직실무는 현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교직생활을 하면서 꼭 알아둬야 할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반드시 문제를 직접 풀어보면서 이해하고 또 이론 및 사례를 찾아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강의시간 후에 반드시 확인하고 모르는 것은 과감하게 질문해서 답을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직실무는 얼마든지 응용해서 출제할 수 있으니 반드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호봉, 경력, 휴직 등의 계산문제는 더욱 그렇다. 교육법 : 교육법도 중요한 분야라서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데. 문제는 자주 법이 개정되고 입법 예고되어 시의적절하게 공식적인 사이트를 찾아서 체크해줘야 한다. 시중에 교육법만 잘 정리된 책도 있긴 한데 임용준비하고는 차원이 다르니 유의해서 전문직으로서 알아야 할 법을 실무중심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자성어 : 사자성어는 꼭 한 문제씩 출제되는데 일부러 외면하고 피할 필요는 없다. 틈틈이 봐두면 도움이 된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교육과 사람 등에 관련되는 사자성어를 추출해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어설프게 알면 오히려 헷갈려서 놓칠 수가 있다. 사자성어 1문제도 1점이다. 서류점수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큰 점수인 셈이다. 시사·상식 : 상식공부는 별도로 하기가 좀 그렇다. 그래서 필자도 평소에 신문에서 교육관련 기사나 신용어 위주로 읽고 메모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막판에 FTA 관련 용어를 전부 외웠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중에 나와 있는 최신 시사용어 책을 한권 사서 본다고 했지만 제대로 보질 못했다. 마지막에 불안하니 그냥 중요한 것들만 좀 읽었다. 평소에 시사적인 용어에 좀 더 신경써보자. 논술 : 논술은 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중에 백지에 써 보려니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했다. 더군다나 예상문제도 전혀 모르고 예상문제를 만드는 것도 안 되고 막연하게 어떤 분야에 대해서만 읽어보고 기술해보니 전혀 현실적으로 도움도 안 됐다. 도대체 예상문제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논술체계나 나름대로 잡아보고 임용준비 논술, 신문에 나오는 대입논술 등의 자료를 참고로 생각을 정리해서 써보는 걸로 만족했다. 논술 준비는 일단 도교육청에서 발간하는 장학자료, 경기교육, 도교육청홈페이지 홍보자료, 공문 등을 주로 참고하고 교육부에서 발간하는 교육마당, 한국교육신문사의 새교육, 한국교육신문 등에서 추출하여 블로그에 담아두고 출력해서 읽어보았다. 논술은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피력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에 맞는 이론적 배경지식, 근거가 될 만한 자료 등을 활용하기 위해 평소에 교육과 관련되는 글들을 자주 읽어 보고 주윗분들과 토론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남의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더 명백하게 정리하고 또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연습을 한 것은 거의 4월이 넘어서서 주말에 겨우 1편 정도 시작한 것 같다. 5월 서류접수 이후에 평일에도 1편씩 써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끝까지 완성은 못하고 개요나 대충의 내용만 적어보고 마지막 2주 정도 제대로 시간을 재어가면서 연습했다. 누가 첨삭지도 해줬으면 좋겠지만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고 해서 몇 가지는 워드로 써서 선배 장학사님께 이메일로 부탁드리고 팩스로 넣고 찾아뵈었다. 장학사가 되기 위해서는 장학사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지도를 받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컨설팅을 받고 나니 조금 마음이 안도되었다. 기획 : 기획은 그야말로 장학사의 능력을 판가름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야이다. 전문직을 준비하면서 앞서 나가신 선배 장학사의 지도 조언을 받는 게 좋으리라 생각한다. 아니면 학교에서 연구, 교무부장을 하면서 직접 학교교육계획을 수립해보는 경험,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공문을 나름대로 재분석, 구성하여 편집해보는 경험, 교육청에 일을 도와줄 때 직접 담당 장학사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재구성해보는 경험 등이 중요하다. 기획은 1월부터 쏟아지는 신년도 공문들 중에 참고할 만한 주제들을 뽑아서 처음에는 읽어보고 나중에는 직접 요약·재구성하다보면 나름대로 체제가 잡히고 안목이 생긴다. 필자도 처음에는 공문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많은 내용을 어떻게 이렇게 잘 기획할까’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계속 연구하다 보니 도에서 내려오는 공문도 허점이 보이고 다시 재구성해야 할 부분들이 보였다. 지역교육청에서 나름대로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또 문제는 시간이 제한되어 창의적인 내용으로 기획해야 하는데 고민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해결방법은 평소에 꾸준히 읽어보고 다르게 해석해보고 비판해보는 방법밖엔 없다. 먼저 큰 주제를 보고 주제에 맞은 4 ~ 5개 정도의 세부적인 실천계획을 창의적, 구체적, 논리적으로 뼈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부수적인 배경, 근거, 목적, 예산, 홍보, 평가, 일반화, 행정사항 등이 필요한 것이다. 면접 : 면접은 다음날 별도로 보기 때문에 조금 마음을 놓을 수는 있지만 나름대로 준비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특히 교육학을 공부할 때도 면접거리가 될 만한 주제는 반드시 메모지에 기록해뒀다가 틈틈이 꺼내서 보는 습관, 논술, 기획을 공부할 때도 면접으로 묻는다면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고 상상을 해보는 이미지 메이킹 작업 등, 결국 면접은 별도로 준비하는 것보다는 ‘교육학·논술·기획·면접’이 모두 한 흐름 속에서 이해, 집중, 반복, 암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면접은 당일의 컨디션이나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다. 전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마음으로 충분히 잠자고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나서 마치 기분 좋은 옛 친구를 만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면접에 임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요령은 일반적으로 편안하게 웃는 얼굴로 핵심적인 답변을 자신감 있게 논리적으로 대답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가능한 결론부터 짧게 대답하는 훈련을 하면 좋겠다.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면접하려면 아무리 장황하게 논리적으로 많이 아는 것처럼 설명해도 핵심적인 요점을 간단히 말하는 것보다 고득점을 하기가 어렵다. 면접관의 시선을 정면으로 보는 것보다는 넥타이부분 정도에 시선을 두고 자신감 있는 듯 편안하고 간단하게 대답하는 요령이 필요하겠다. 면접 준비는 마지막에 스터디를 하면 좋다고 하는데 필자는 끝까지 혼자 했다. 전문직으로서의 각오 평소에 교육청 일과 관련되어서 일하다가 정말 교육청과 학교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학교를 지원해주기 위해 교육청과 장학사가 존재하는데 현실은 아주 다른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겠지만, 장학사들이 노력하는 만큼 학교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또 개인적인 생각은 교육전문직은 학교, 학생, 교사를 위해 최대한 지원, 봉사하고 학교교육의 질, 교사의 전문성, 학생들의 학습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서비스직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경력교사들이 승진의 개념으로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고 합격한 후 교감, 교장의 승진대열에 합류할 수 있어서 오로지 시험에만 몰두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문직은 정말 묵묵히 아무런 대가 없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현장의 수많은 교사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해 교육의 원동력에 힘을 실어주고, 학교와 학생, 교사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무한한 봉사의 기쁨을 누리려는 각오로서 시험공부에 임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결정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21세기 지식기반 정보화 사회, 국제화 사회라는 문명사적 대전환점을 맞이하면서 교육의 경쟁력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교육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가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높은 도덕성과 창의력을 갖춘 21세기형 인재 양성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핵심전략이기 때문에 교육에서 이런 능력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 세계가 교육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각종 교육개혁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저마다 교육개혁으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듯이, 우리도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교육개혁의 틀을 짜고 실천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 교육은 획일적 평등주의, 국가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 사교육비 부담 증대, 빈약한 교육현장의 자율권, 낡은 교육이념 등으로 인하여 전문화, 자율화, 다양화, 개방화 교육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와 사회, 학부모, 교원이 21세기형 인재양성을 위해 희망과 신뢰가 넘치는 질 높은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경쟁’이라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교육의 시스템 개선을 위한 방안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의 ‘경쟁’은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생산적인 경쟁을 의미한다. 교육에서는 이것이 교육적 경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경쟁이 학교와 학교, 교원과 교원, 지역과 지역 사이에 살아 있게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학교교육의 질은 높아질 것이고 국민들의 신뢰도 향상될 것이 분명하다. 학교의 경쟁이 생산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단위학교의 자율적 운영이 이뤄져야 한다. 교직원 인사와 재정(수입과 지출) 운영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해 주고 이에 따른 책임도 함께 물을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 관한 제반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이를 통해 교육 수요자들이 학교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학교 정보의 공개는 학업성취도 등의 교육성과, 특성화된 교육과정 운영과 교육활동, 효율적인 교육환경과 여건 조성,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교육서비스, 우수한 교수진 및 지원인력의 확보, 지역사회와의 대외관계 등에서 근본적인 개선과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원의 경쟁이 교원의 전문성 향상과 학교교육력 신장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평가, 승진, 보수 등과의 연계시스템을 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원의 수업지도, 생활지도, 상담 및 인성지도, 진로 및 진학지도, 학급관리, 업무수행능력, 조직공헌도, 학부모 상담능력 등의 영역에서 전문성의 신장과 발전을 위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경쟁이 바람직하다. 교원들이 이런 경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시행할 수 있으려면 사기 앙양책과 더불어 인사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 정부가 주도하는 각종 교육정책의 실패가 야기한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교원들의 책임인 양 호도해서는 안 된다. 우수한 교원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과 부족한 교사에 대한 연수 지원 등의 인사행정이 뒷받침되어야만 교원의 생산적인 경쟁이 정착할 수 있다. 그리고 지역과 지역의 경쟁은 생활을 중심으로 한 교육자치 시스템의 실현을 전제하고 있다. 현행 ‘교육부-시·도교육청-지역교육청-학교’로 이어지는 교육행정체제는 과도한 중앙집중적 관료제를 필연으로 수반하고 있다. 특히 각종 교육관련 정책의 생산과 집행, 교육예산의 배분 등에 있어서 막강한 힘이 교육부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지역사회의 교육적 요구 수용이 유연하지 못하고, 지방행정자치의 책임감이 약해지며, 지역적 특성에 맞는 교육실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다. 따라서 지역간 교육에 대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교육의 책임을 국가와 광역 단위에만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주민 단위로 확대시킴으로써 전반적인 교육력 향상을 기대할 수가 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각 교육행정 단계별 역할의 재정립 혹은 통폐합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교육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교육시스템의 개선책은 이 밖에도 다양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우리나라가 새롭게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면서도 국가발전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소명을 교육계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를 존중하면서도 이웃과 환경에 대한 따뜻한 온정을 지니고 있는 바람직한 인간을 위한 교육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명제이다. 이러한 기저를 토대로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국민의 교육권 중에서 학습자의 학습권을 최우선으로 보장하고, 교육의 자율성을 확대하며, 교육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구현하는 동시에, 교육수요자의 학교(교육) 선택권을 확대함으로써 교육의 성과를 높이고 책임 있는 교육을 실현한다는 방향을 견지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학교 간, 교원 간, 지역 간 선의의 교육적 경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교육의 책무성을 다하게 되고, 학교교육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것이며 우리의 자녀들은 이웃과 국가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 의식, 애국심, 인류애 등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 야구 원년부터 활약하여, 프로 야구 초창기 아주 잘 나갔던 선수 중에 OB 베어스의 신경식 선수가 있다. 188㎝의 큰 키에 시원한 장타를 날리고, 학 다리처럼 긴 다리를 벋어 1루 수비를 멋있게 해내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인상적이다. OB 베어스 팬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던 선수였다. 그가 선수로 한창 기량을 발휘하던 무렵, 어느 자리에서인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신경식은 어려서부터 야구에 재능을 발휘하여 초·중학교시절부터 야구 선수로 뽑혀 활약을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집에서는 제대로 뒷바라지를 해 주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 이런저런 고생을 하던 그의 어머니는 시골에서 닭을 길러 계란을 모으면, 그걸 장날에는 머리에 이고 가서, 장에 내어 팔아 가계를 꾸렸단다. 운동하는 아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사뭇 안타깝고 아쉬웠을 것이다. 그 살림에 고기를 사 먹이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단다. 장에 내다 팔아야 하므로 계란조차도 제대로 마음 놓고 먹일 형편이 아니었다. 또한 형편이 괜찮다고 한들, 이미 검약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어머니로서는 아끼고 절제하는 가르침을 강조하였단다. 신경식 선수가 소년 야구선수로서 지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이면, 어머니는 계란을 담거나 나르다가 실수로 종종 깨뜨리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이쿠 내가 한눈을 팔다가 이 아까운 것을 또 깨어 버렸구나” 하고서는 깨진 계란들을 얼른 수습을 하시고는, 그걸로 계란찜을 해내거나, 계란탕으로 만들어 아들에게 먹도록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꼭 있었단다. “양계장에 모아 놓은 계란은 장에 갖다 팔아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손댈 수 없고, 이건 어차피 내다 팔 수 없게 된 계란이니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계란이 깨어진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이렇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잘 된 일이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된 신경식선수의 고백은 어머니의 숨은 마음을 헤아리는 데로 이어진다. 어머님은 실수로 계란을 깨트린 것이 아니라, 일부러 깨뜨린 것이라는 고백을 한다. 짐짓 실수인 척하시면서 사실은 알고서 깨뜨린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어머니의 실수인가 보다 했지만, 나이 들어서 그 시절의 정황을 되짚어 보고, 어머니의 성품과 사랑을 다시 반추해 보니 어머니의 행동과 말씀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겠더라고 했다. 가난한 살림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어머니는 운동하는 아들을 제대로 먹이고 싶은 마음과 절약의 현실을 아들이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이런 행동과 이런 언어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정작으로 그의 어머니가 아들 신경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수로 깨뜨렸다는 둥, 깨어진 것이니까 너를 먹도록 허락해 준다는 둥 하는 말들은 어머니가 짐짓 아닌 척 하며, 그저 표면으로 내세우는 말들이다. 어려운 살림의 현실 속에서 아들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은 소중하게 안으로 안으로 숨어서 쉽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낸 말들은 안으로 숨어 있는 소중한 마음들을 보호하고 간직하기 위한 장치들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마침내 읽어낸 아들의 추억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작고 아름다운 감동을 경험한다. 그러하니 말이 주는 감동이란 말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과 말의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사적(修辭的) 감동이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은 그 화려함이나 당당한 표출만으로 얻어지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진정한 마음을 꼭꼭 숨기어 보전하는 데서 감동이 긴 여운을 가지고 생겨난다. 이런 감동은 다시 다른 말로 드러내어 응답하는 것도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상대의 소중하고 깊은 마음의 배려를 받았을 때, 그것을 뒤늦게 감동과 더불어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전혀 몰랐잖아!” 어딘가 즉흥적이고 호들갑을 떠는 방식으로 호응한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어딘가 상투적이고 공허한 반응임을 느낀다. 배려는 배려로 이어짐이 좋다. 이쪽 또한 드러내지 않는 말로써 내 소중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차분한 자세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사람살이가 남들과 어우러져 되는 것이니, 모두 말로써 이루어진다. 말을 해야 서로 뜻을 헤아려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은 하라고 있는 것이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도, 말 안하면 손해라는 의식이 담긴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뜻이 높아도 말로 드러내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목에 핏대 세워 하는 말도 알아듣기 힘든데, 드러내지 않는 말을 무슨 재주로 이해하란 말인가. 얼핏 그렇게도 생각된다. 그러나 말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말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말아 버린다면, 그 얼마나 삭막한 사람살이가 될까. 드러내는 말,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말의 세계가 얼마나 오묘한지를 모른다면, 그 또한 사람살이의 진면목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뜻과 마음을 전하고 알아차리는 일은 여간 섬세하고 그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드러낸 말의 저 깊은 심층을 소리도 없이 모양도 없이 흘러간다. 다만 은은한 향기를 스칠 듯 말 듯 오래 마음의 자취에 남긴다. 그러니 드러내지 않은 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본 연후에 그 사람의 말을 보면 드러내지 아니하는 말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참으로 오묘하고 신통한 것이어서 깊고 소중한 뜻일수록 쉽사리 말의 굴레에 갇히지 아니한다. 오히려 드러내는 말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서 있거나 숨으려 드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 일찍이 ‘관음(觀音)’이란 것이 있었다. 글자 뜻 그대로는 ‘소리를 본다’는 뜻이니, 소리는 듣는 것인 줄만 알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생소한 개념이다. 불가의 관음법문은 즉각적인 깨달음과 영원한 해탈을 보장하는 일종의 명상법이라고 하는데,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면 높고 고매한 경지의 의사전달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관음(觀音)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소리의 진동을 명상하는 방법이라 한다. 그런데 이 내면의 빛과 소리는 육체의 눈과 귀로는 들을 수 없으며, 언어와 두뇌를 초월한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지혜의 눈을 열게 됨으로써 이 내면의 빛과 소리를 즉시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드러내지 않는 말’로 가장 소중한 의사전달을 부지불식간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는 분명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다 본 뒤에 얻을 수 있는 현자의 지혜를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지혜’란 것이 위대하고 고상한 철인(哲人)에게서만 찾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정성으로 아끼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찾은 자의 행복이다. 진정한 우정의 친구가 보내주는 마음의 배려 또한 그 대부분은 ‘드러내지 않았던 말’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이 또한 그것을 발견한 자의 기쁨이다. 요컨대 상대의 ‘드러내지 않았던 말’이 지닌 소중한 메시지를 마침내 알아차리고야 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 성숙이 중요한 것이다. 나 같은 세속의 사람들에게 ‘관음(觀音)’의 경험이 달리 있겠는가.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위하여 ‘드러내지 않았던 말’, 그 말의 틈새에 숨어 있었던 간절함의 의미를 내가 마침내 발견하여 떨리는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이 곧 ‘관음(觀音)의 경지’ 아니겠는가. 소중하기 그지없는 말은 밖으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법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말의 본성인 동시에 마음의 본성인지 모른다. 극진한 사랑의 감정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젊은 영혼들의 고백들이 왜 존재하겠는가. 김소월의 시 ‘초혼(招魂)’에서 우리는 그런 말의 모습과 마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내 하지 못하였던 말에 가장 깊은 영혼의 목소리가 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말이 존재하는 궁극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드러내지 않은 말,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말,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숨은 신(神)이 거하는 곳이 아닐는지.
참여정부와 교육계의 불편한 만남 참여정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국정목표로 삼고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출범하였다. 특히 12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교육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을 제시하며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예고하였다. 정부의 적극적인 IT분야 개발 의지와 노력이 우리나라를 IT강국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정부의 교육개혁의지는 백년지대계라고 할 수 있는 교육을 올바로 세우는 데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교육개혁의지는 긍정적으로만 나타나지는 않았다. 참여정부가 주도한 교육정책은 지난 8월 16일 발표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국민적 관심과 이해 집단 간 갈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 교육정책 실현의 경우 전교조를 포함한 교육관련 단체들과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많은 갈등을 야기했다. 참여정부와 교육계는 실행 초기부터 불편한 만남의 연속이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2개월 후인 그해 4월 보성초등학교 서승목 교장의 자살과 그로 인한 전교조와 교총의 갈등 양상의 전면전을 시작으로 NEIS 도입을 둘러싼 교육 안팎의 뜨거운 공방, 이기준 교육부총리의 3일 불명예 퇴진 등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불거졌다. 이슈화 되어 수면에 떠오른 문제들의 바닥에는 참여정부 이전부터 지속되던 집단 간 갈등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참여정부 역시 과거의 정권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교육당국과 교육관련 단체 및 교육관련 집단 간 갈등 상황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과 맞물려 사회 이슈화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존재했던 갈등의 불씨가 참여정부에서 왜 지속적으로 발화하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민의 민주적 참여를 모토로 삼았던 참여정부가 정작 교육관련 단체들의 참여와 화합을 이끌어 내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교육정책을 추진하면서 현장의 민주적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점을 갖고 참여정부의 초등교육 관련 교육정책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즉, 참여정부의 초등교육정책이 초등교육 관련자들의 참여를 충분히 반영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는지, 또 다른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참여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참여정부는 지난 8월 16일 발표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에 이르기까지 약 4년여 동안 많은 교육정책들을 발표하고, 집행하였다. 참여정부의 초등학교 관련 교육정책은 크게 둘로 나누어 참여정부에서 내걸었던 교육관련 대선 공약과 참여정부 임기동안 교육부가 제시한 초등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정책들로 볼 수 있다. 교육정책이 어떤 모습으로 실천되었는지, 이러한 정책들이 초등교육현장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를 정리하고 이런 정책들이 초등교육관련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① 의견수렴 더 필요한 학제개편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초등교육 관련 정책으로 학제 개편 논의를 들 수 있다. 현행 학제는 1951년부터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의 우리나라 학교 급별 수학연한을 근간으로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현행학제에 대한 개편 논의는 참여정부가 처음 언급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사회 변화를 지적하며 몇 차례의 학제개편 논의가 있었으나 사회 전반에 미치는 큰 영향력과 엄청난 비용으로 본격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참여정부에서 2006년 교육부와 교육혁신위원회가 공동으로 ‘미래사회의 도전 : 한국교육,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학제개편 제1차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학제개편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토론회를 시발점으로 하여 2006년 한 해 동안 교육개발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학제개편에 대한 연구를 시행하고 발표하였다. 참여정부는 학제를 개편해야 하는 이유로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도래로 인한 미래사회의 급격한 사회 환경 변화, 지식기반사회에서 살아갈 창의적 인재 육성의 필요성 등을 들며, 현재의 6-3-3-4제의 수업연한을 5-3-4-4제 혹은 6-4-2-4-제, 6-6-4제 등으로 개편하고자 한다. 특히 초등학생의 신체적·인지적·사회적 성장발달이 빨라졌으므로 초등학교 수업연한을 5년으로 줄이자는 개편방안도 힘을 얻고 있다. 5년으로 초등교육을 단축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동의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초등교육 관계자들의 의견이 좀 더 반영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5년으로 단축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단축의 의미가 아니다. 초등학교의 전반적인 조직구조 개선과 교육과정의 개편, 교원의 축소를 의미한다. 초등학교 관련자들과의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다. 정부의 발표와 국민의 여론만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나아가 초등학교 수업연한 단축의 근거로 제시하는 초등학생들의 성장발달 측면도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영양섭취가 잘 되어 과거보다 신체적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 초등학생의 몸집보다 커졌다고 몸에 맞게 학교를 가야 한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으며, 인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발달하였는지도 의문이다. 과거 30년 전, 10년 전의 초등학생 수준보다 향상되었다고 초등학교를 일찍 졸업해야 한다는 것이 과연 초등학교 수업연한을 단축하자는 타당한 이유가 될까? 우리나라의 전 교육기간이 다른 국가에 비해 길고, 사회입문 시기가 늦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 점은 분명 학제개편을 통해서 조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 당연히 초등학교의 수업연한도 단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이유로는 초등학교 관련자들의 긍정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학제개편의 타당한 논리적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현장교원 및 학계와의 충분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 ② 교육기회 넓힌 방과 후 학교 두 번째로는 방과 후 학교 활성화 정책이다. 방과 후 교육활동과 관련된 정책이 시작된 것은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과제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1999년에 특기적성교육이란 명칭으로 실시되다가 2004년 사교육비 경감대책으로 특기적성교육에 방과 후 교실과 수준별 보충학습이 추가되었다. 이후 이런 개념들을 통합·발전시켜 방과 후 학교란 개념으로 2005년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방과 후 학교 활동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부담이 되는 비싼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소외지역 학생들의 학력격차와 교육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현실적으로 저소득층 학생들까지도 사교육 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없던 사교육비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극단적인 측면에서는 사교육을 학교 내부로 끌어들이는 빌미만 제공하였으며, 학교에서 방과 후 학교 활동을 한다고 해도 값비싼 학원 교육이나 고액과외를 받는 부유한 가정의 학생들보다 나은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중등학교와는 달리 초등교육현장에서는 저소득층 자녀에 대한 에듀케어 교실 운영 등 종합적인 학교교육의 영역을 넓힌 수요자 중심의 교육정책이라는 점, 소외된 저소득층 계층 학생들의 보육 및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③ 저출산 문제, 교육의 질 향상 기회로 세 번째로 저출산 대비 초등교원 정원 감축과 관련된 문제이다. 교원의 정원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 무리한 정년단축을 통한 교원수급 불균형을 초래한 이래 많은 교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정책 중 하나이다. 그런데 참여정부에서도 출산율 감소와 관련하여 초등교원을 포함하여 교원의 정원을 감축하겠다는 뜻을 비치고 있다. 그러나 현재 OECD회원국 중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의 교육여건을 생각한다면 출산율 감소로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초등교원의 정원 감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정부의 논리는 초등교육 관련 구성원들을 설득하기에 부족한 감이 있다. 교원의 정원을 감축하기보다 오히려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적절한 정책방향이다. 현재의 학급 기준 교원 배치 방법을 적정 학생수당 교원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바꾸고 표준수업시수 또한 법제화 한다면, 저출산으로 인해 발생되는 초등교원 정원 감축 문제를 교원 1인당 학생 수 감소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국가가 저비용으로 공교육의 내실화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초등교원의 적정 수업시수 마련까지도 고려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교원정원 감축은 학급당 학생 수, 교원 1인당 학생 수, 수업시수 등의 교육지표를 동시에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학생 수 감소는 곧 교원 수 감소라는 단순 논리는 산재해 있는 초등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④ 종합적인 연구 요구되는 영어 조기교육 네 번째로 영어교육활성화 5개년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초등 1, 2학년에 대한 영어교육 실시 정책이다. 교육부는 2006년 5월 전국 16개 시·도에서 운영될 ‘초등 영어교육 연구학교’ 50개교를 선정, 발표하였다. 선정된 초등학교의 1, 2학년 학생들은 2006년 9월부터 영어교육을 받고 있다. 연구학교는 2008년 8월까지 2년간 운영될 예정이며, 교육부는 연구학교 운영 결과를 분석한 뒤 2008년 하반기에 초등 1, 2학년 영어교육 시행 여부 및 구체적인 방법을 결정할 예정이다. 초등학교 영어교육은 1997년 처음 도입되었으며 올해로 11년째에 이르고 있다. 도입 당시에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영어능력이 향상되고 학교 영어교육이 보다 실용적인 방향으로 전환되는 등 긍정적인 영향이 매우 컸다고 교육부는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연장선상에서 교육부는 영어교육을 초등학교 1, 2학년에도 도입할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동안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의 연차적 확대 배치 및 영어체험학습센터의 설치·운영 확대와 같은 영어교육을 위한 노력은 매우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되었으며,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 역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3∼6학년에 영어교육을 도입할 시기에도 언급된 문제이지만, 초등학교 1, 2학년에 도입되는 영어교육은 조기 영어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도 따져보아야 하고, 조기 영어교육이 공교육기관인 초등학교에서 시행됨으로써 빚어질 사교육 시장의 변화 및 조기 영어교육이 우리말 교육 및 정체성 함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좀 더 면밀하고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1, 2학년 영어교육 도입에 대한 연구가 매우 짧은 기간에 이론적 토대를 만들고 바로 시범학교 운영에 들어갔다는 것은 1997년 시행된 초등학교 3∼6학년에 영어교육을 도입할 당시의 어려움을 상기할 때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실시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영어로 인한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조기유학 및 해외 어학연수 등이 늘고 있고, 영어교육의 양극화가 커지는 등 부정적인 측면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초등학교 3∼6학년 영어교육 실시로 인해 나타난 문제점으로는 초등학생 영어 사교육의 심화를 들 수 있으며, 빈익빈부익부에 따라 학생들로 하여금 영어에 대한 좌절감만 일찍부터 갖게 하였다는 지적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시기를 당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정한 주당 수업시수를 확보하는 문제나 교재개발 및 적정 환경의 조성 측면도 반드시 고려해보아야 할 측면이다. ⑤ 학습 부담된 진단·학업성취도 평가 다섯 번째로 학력 격차 현황 파악을 위해 실시되고 있는 진단평가 및 학업성취도 평가와 관련한 부분이다. 소외 지역 학생의 학력 신장을 위한 노력으로 정부는 초등학교 3학년에 진단평가를 실시하고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학업성취도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국가수준의 학업성취 기준을 정하고 이의 도달 정도를 평가함으로써 학생들의 학력신장 및 학력의 지역불균형 해소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그동안 인간중심교육을 실시하면서 다져온 초등교육의 내실을 흐트러뜨리고 학생들에게 과도한 학습 부담과 경쟁심을 심어줌으로써 전인적 성장 발달의 기회를 잃게 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초등교육에 있어서 교육의 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는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학교 자체 내의 교육이 국가수준의 평가에 얽매여서 운영되고 초등학교 때부터 학업에 의한 서열화가 시작된다는 우려까지도 일부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서열화로 인해 일부 학부모는 사교육 시장에 학생들을 맡기게 되는 현상까지도 사회 일부에서는 보여지고 있다. 참여정부는 누구를 참여시켰는가? 지금까지 참여정부의 초등교육 관련 교육정책들 중 일부를 살펴보고, 각 정책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참여정부가 모토로 내걸었던 ‘참여’의 관점으로 교육정책을 평가해 보도록 하자. 교육정책은 교육과 관련된 여러 집단들의 엇갈린 이해관계 속에서 펼쳐졌기에 이를 평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어느 한 집단의 관점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 관계자들의 시각이 아닌 참여정부의 시각에서 참여정부가 모토로 내걸었던 것, 참여정부가 ‘하고자 했던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정부의 교육정책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여정부는 교육정책의 기획과 집행에 누구를 참여시키고자 의도했는지 의심스럽다. 누구를 참여시킨 것인지 모르겠다. 초등교원은 교육정책 발현의 대상이 아니다. 교육정책 집행의 주체로서 의견을 내고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모든 정책에 있어 초등교원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 때로는 교원을 제외한 국민여론만을 참고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참여정부의 교육정책들은 그 목적이 어떠했건 결과적으로 학교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교육내용을 변화시키고, 교원들의 업무와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교원과 학교는 교육정책의 기획 및 집행에 참여하지 못했다. 과거에 비해 참여의 기회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교원의 의견과 학교 현장의 현실이 무시되고 있다.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교육정책에 담아내려면 교원과 정책기획자들의 부단한 노력과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해집단 간에 갈등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갈등 현상이 야기되는 것이 두려워 참여 자체를 막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 더 많은 의견을 수합하고 더욱 긍정적인 정책 결과를 낳게 하는 첫 걸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정책들 중 방과 후 학교 활성화 정책과 진단평가 및 학업성취도 평가를 제외하고는 현재 논의되고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정책들이다. 따라서 이후로는 교육과 관련된 이해 집단 및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 교육정책들을 재조정해 나간다면 과거보다 훨씬 나은 교육정책들로 보완될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정책의 수립보다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한 보완이 필요한 시기이다. 더불어 참여정부에서 계획된 정책이더라도 성급하게 마무리를 지으려하기보다는 좀 더 계획적이고 신중한 정책의 추진을 위해 차기 정부로 과감하게 넘기는 것도 용기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책임지는 교육행정 필요하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내내 교육 문제를 리처드 라일리 장관에게 맡겼다. 특히 1999년 4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불우의 총기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무 부처의 장인 라일리 장관을 해임하지 않는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를 보면 임기 내 교육부 장관이 일곱 차례나 바뀌면서 평균 임기가 8개월밖에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참여정부 역시 출범 당시 국정운영 철학이던 분권, 자치, 참여를 교육 현실에서도 구현해야 한다며 당시 노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을 잘 임명해 임기 5년을 함께 하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참여정부와 가장 코드가 잘 맞았던 윤덕홍 부총리가 재임 기간 내내 ‘NEIS’ 문제 등 현안을 쫓다 뚜렷한 개혁 방향조차 제시하지 못한 채 물러났고, 뒤를 이은 안병영 부총리 역시 집단적 수능 부정 등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좀 더 신중한 교육부 수장의 선임과 일단 선임된 수장이 책임지는 교육행정을 펼칠 수 있게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성숙된 정치·사회적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문제를 교육체제 내에서 모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교육문제의 해결은 교육체제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교육과 관련된 문제들과 맞물려 해결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초등교육의 경우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보다는 국민공통 기본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논의되면서 교육기회와 조건의 평등, 교육결과의 수월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는 2003년부터 시작되어 2007년에 마무리된다. 지난 5년간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에 관한 공과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할 시점이다. 참여정부의 출범 당시에 제시했던 교육정책의 이념과 과제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추진되었고 그 효과가 무엇인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교육정책은 사회적, 공공적, 조직적 활동으로서 교육활동에 관하여 국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의 공권력을 배경으로 강행되는 교육에 관한 기본방침이나 지침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육정책에 대한 평가는 교육정책이 추구하는 공통적이면서 동시에 기본적인 가치를 준거로 하여 어떤 한 정책의 목표, 과정, 성과를 이해하고 그 값어치를 판단하는 사회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육정책 평가는 정책의 어느 측면에 중점을 두고서 평가하려고 하느냐의 문제로 정책의 특성, 정책의 과정 또는 평가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참여정부는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이란 슬로건으로 초·중등교육의 공공성 제고, 고등교육의 경쟁력 강화, 능력중심사회로의 전환에 3대 중점과제를 두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 교육주체의 참여와 자율을 통한 참여교육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추진하되, 외부컨설팅을 통한 교육부 혁신, 분권과 자율, 참여를 통한 현장지원체제 구축, 국정과제 실천을 위한 교육재정 확대에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중등교육정책과 관련해서는 공공성 제고 차원에서 공교육 내실화,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사기진작, 국민 기초능력 보장, 교육복지 확대를 강조하였다. 참여정부기간 동안 사회적으로나 국민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야기한 중등교육정책은 고교평준화정책의 유지 및 보완,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주요 정책들이 참여정부 출범당시 상황은 어떠했으며,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과 성과는 무엇인지를 평가하고자 한다. 고교평준화 정책의 유지 및 보완 참여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은 고교평준화 정책이 교직단체와 학부모단체 중심의 사회적 핵심 이슈로 등장하여 많은 논쟁을 야기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참여정부에서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한계를 보완하는 다양한 유형의 학교제도 정책을 전개하였다. 참여정부는 고교평준화 정책과 관련하여 외형적으로는 유지·보완의 정책을 펼쳤지만 내용적으로는 고교평준화 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교평준화 적용지역은 계속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새로운 학교운영형태인 자립형 사립고와 개방형 자율학교는 시범 운영에 머물렀다. 고교평준화 정책은 1974년 도입 이후 중학교 교육과정의 정상화, 과열 과외 완화, 고등학교 간 격차 완화, 고교 교육기회의 확대 및 균등한 보장이란 측면에서 일정부분 기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고교평준화 정책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학교교육의 획일화, 학교선택권 제한, 이질적인 학생집단으로 인한 교수·학습의 애로, 학력 저하로 인한 하향평준화, 사학의 특수성 무시, 학생 생활지도의 곤란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고교평준화 실시 지역 현황은 1974년 2개, 1975년 5개, 1979년 12개, 1980년 13개, 1981년 21개, 1990년 18개, 1991년 15개, 1995년 14개, 2000년 17개, 2002년 23개, 2005년 26개, 2005년 27개, 2006년 28개 지역이다. 2007년 현재 고교평준화 정책 적용지역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수원, 성남, 고양, 부천, 과천, 군포, 안양, 의왕, 청주, 전주, 익산, 군산, 창원, 마산, 진주, 목포, 순천, 여수, 제주, 김해시에 포항시가 추가되었다. 이처럼 고교평준화 지역 확대의 원인은 최근 대학입시에서 학교 간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는 내신이 강화되면서 비평준화 지역 우수학생이 상대적으로 입시에서 피해를 보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학부모들의 평준화 요구가 강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① 평준화 정책에 대한 실증적 연구 실시 참여정부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효과에 관한 연구를 본격화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는 등 평준화 정책의 적합성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교육개발원은 2004년부터 평준화 지역과 비평준화 지역의 고교를 비교하여, 학업성취도 차이 검증을 실시하였다. 조사결과는 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고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학업성취도 차이를 분석하였다. 이의 결과는 평준화와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성적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 평준화 정책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하향평준화한다는 주장은 확증하기 어려운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처럼 참여정부는 평준화 정책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평준화 정책은 중등교육정책으로 적합한 것으로 평가하고, 평준화 정책에 관한 불만과 문제점을 잠재우고 평준화 적용 지역을 유지 및 확대하는 정책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학생선발 및 배정에 관한 학부모 및 학생의 학교선택권 제약에 따른 불만 증대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학교교육의 수준차이 등을 해소할 수 있는 별도의 정책들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평준화 정책의 강화 속에서도 이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형태의 고교운영체제로 등장한 이 자립형 사립고와 개방형 자율학교의 시범·운영이었다. ② 자립형 사립고, 개방형 자율학교 시범 운영 고교평준화 정책을 보완할 목적으로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립형 사립고제의 도입이었다. 이 방안은 지식기반사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리 교육체제도 종전 산업사회 시대의 획일적이고 정형화된 교육체제에서 다양화되고 특성화된 교육체제로의 변화가 불가피하므로 보다 유연하고 자율적인 학교운영이 요구되었다. 특히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학교교육체제의 정립이 절실하게 요청되어 국민의 정부 말기에 제안되었다. 따라서 자립형 사립고의 추진 목적은 사립학교 본연의 역할을 회복시켜 다양하고 독특한 건학 이념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재정이 건실하고 건학 이념에 걸맞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립고교에 교과과정 운영 및 학생선발, 등록금 책정 등에 대한 폭넓은 자율권을 부여하고 이에 따른 책무성을 확보하려는데 있다. 국민의 정부는 2001년 10월에 5개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하면서 2002년부터 민족사관고(강원), 포항제철고(경북), 광양제철고(전남)는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2003년부터는 해운대고(부산), 현대청운고(울산), 상산고(전북 전주)가 3년간의 추가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자립형 사립고의 학교운영방침은 학급당 학생 수 15∼35명, 학년 당 학급 수 6∼13학급, 교원 1인당 학생 수 4∼20명, 연간 납입금 일반고교의 100∼300%, 장학생 수 전교생의 15% 이상으로 설정되었다. 참여정부는 2005년도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시범운영에 대한 평가결과를 발표하였다. 첫째는 다양하고 특성화된 형태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구비하였다. 둘째는 고교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셋째는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교육혁신을 실천하였다. 넷째는 사학운영의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다섯째는 학생을 위한 학생지도체제를 마련하였으며, 입시위주 교육환경에서도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도록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립형 사립고 운영의 한계로는 공평한 교육기회의 접근의 한계, 입시위주 학교운영체제, 학부모의 재정 부담 가중, 학교재정 자립의 한계, 고교교육의 특성화 추구 한계가 동시에 지적되었다. 이러한 자립형 사립고 종합평가결과에 대해, 참여정부는 많은 사학재단이 자립형 사립고 확대가 필요하다는 건의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를 확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동시에 이들 학교의 시범운영을 추가 연장하기로 결론지었다. 고교평준화 정책의 보완책으로 두 번째로 등장한 정책이 개방형 자율학교이다. 2005년 7월 참여정부는 혁신도시 정책과 연관하여 새로운 학교경영 및 운영방식에 대한 자율성을 확대하는 공영형 자율학교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2005년 12월과 2006년 2월, 시·도교육감과 학교운영계획에 대한 협약을 맺은 뒤 학교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대안형 학교로 공영형 자율학교를 2007년부터 시범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영형 자율학교의 명칭이 공모과정을 거쳐 개방형 자율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개방형 자율학교는 국가 지방자치단체가 학교 설립 운영에 필요한 자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부담학고 학교운영 주체가 인가권자와 협약을 맺어 학교 운영 전반에 걸친 운영권을 부여받는 것으로, 협약에 따른 교육을 실시한 후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학교를 말한다. 2006년 10월 16일 정부는 자립형 사립고에 대한 신설보다는 개방형 자율학교를 신설하는 고교 유형 다양화 정책을 수립하여 발표하였다. 고등학교 혁신모델로 검토해 온 개방형 자율학교 시범학교는 서울 원묵고(’07년 신설), 부산 부산남고, 충북 목령고(’07년 신설), 전북 정읍고를 선정하였다. 개방형 자율학교는 지식의 단순암기, 전달교육을 벗어나 전인교육의 실현과 고교교육의 혁신을 지향하는 학교로 2007학년도부터 2010학년도까지 시범 운영된다. 참여정부는 이번 시범학교 선정을 위해 현장 교원, 학계, 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로 개방형 자율학교 시범운영 추진위원회를 구성 운영하여, 시·도교육청에서 2007학년도 시범운영교로 추천한 9개교를 대상으로 심사하였으며 그 중 4개교를 선정하였다. 정부는 ’07년 시범학교를 선정함에 있어 평준화 지역과 비평준화 지역, 신설학교와 기존학교, 해당 지역의 교육여건 등 여러 요인들을 고려하였다. 당초, 기초지자체 재정지원을 시범학교 선정기준으로 하였으나, 입시위주교육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어 시범학교 선정기준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특히 정부는 앞으로 이 학교가 입시위주교육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학생모집 단계에서부터 학부모, 학생, 교원 등 관계자들에게 전인교육 등 제도도입 취지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사교육비 경감 종합 대책 2003년 참여정부 출범 당시 중등교육의 현실은 학생의 다양한 교육적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학교교육의 내용·체제 부족으로 학교교육의 신뢰가 저하되어 있었다. 또한 학벌주의 사회풍토와 과도한 대입경쟁으로 학교본래의 기능과 공공성이 약화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한 계층 간 소득격차의 심화, 가정의 교육적 기능약화, 급격한 도시화 등으로 계층 간·지역 간 교육격차가 상존하고 있다. 아울러 전체 사교육비 규모는 매년 증가 추세에 있는 등 교육문제에 대한 국민과 학생, 학부모, 교원 모두의 불만이 상당하였다. 이러한 공교육 불신과 우려 상황은 참여정부로 하여금 집권 5년 동안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노력으로 사교육비 경감 대책에 주력하게 했다. 사교육비는 지역 간, 계층 간 격차와는 관계없이 모든 국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고 있다.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 정도는 1990년 6708억 원, 1994년 6조 5315억 원, 1998년 13조 2841억 원, 2000년 7조 1276억 원, 2003년 13조 6485억 원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사교육비 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이나 소득증가율에 비해 훨씬 높아 가정 경제에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4년 한국교육개발원에 의하면, 사교육비 규모는 13.6조원으로, 초등학생은 21만원, 중학생 28만원, 인문계 고등학생 30만원, 실업계 고등학생 18만원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사교육 참여 학생이 약 72.6%로 보고되고 있다. 2004년 11월 말 통계청의 사회통계조사 결과에 의하면, 2000년의 경우는 가구당 월평균 자녀교육비가 37만원, 학원·보충교육비가 13만원이었으나, 2004년의 경우는 각각 50만원과 23만원으로 크게 증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19.4만원으로 고등학생의 1인당 18.8만원보다 많이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정부는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갖게 된다. 2003년 5월 28일 교육부에 사교육비대책팀을 마련하고, 사교육비경감대책위원회를 구성, 운영하였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사교육비경감대책연구팀을 설치하였다. 사교육비 관련 정책토론회 10회 개최하였고, EBS 생중계 실시와 지역 순회 공청회, 지역인사 간담회 등을 실시하였다. 2004년 2월 17일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발표하였다. ① EBS 수능방송 및 사이버 가정학습 확대 참여정부의 사교육비 경감대책으로 추진된 대표적인 사업은 다음과 같다. 첫째, e-러닝 체제 구축으로 수능과외 대체 : EBS 수능방송 및 인터넷 서비스 실시(2004. 4. 1∼), 사이버 가정학습 서비스 전국 확대(2005. 3. 1∼) 둘째, 방과 후 수준별 보충학습을 통한 교과과외 흡수 : 학교 내에서 양질의 교과 관련 심화보충학습 프로그램 운영을 통한 사교육 수요 흡수,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저소득층 자녀 지원(2005년의 경우, 7만 3400명에게 102억 6천만 원 지원) 셋째, 특기적성 교육을 활성화하여 재능, 영어 사교육 수요 충족 : 재능·취미·기술 개발 교육 프로그램 운영, 영어체험학습센터 및 영어캠프 운영 확대, 학력경시·경연대회 폐지 및 입시반영 제한(2004. 10) 넷째, 초등학교 저학년 방과 후 교실 운영으로 탁아수요 흡수 및 교원의 전문성 및 책무성 제고를 통한 학교교육의 신뢰 제고(교원평가제 시범 운영, 2005년 11월) 다섯째, 기초학력 책임지도, 교육복지확대 등 국민기초교육 수준 보장 : 국민기초·기본교육 보장을 위한 국가수준 평가 실시,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정보화 지원확대(PC 3만 명, 통신비 10만 명 지원), 도시 저소득지역 대상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원 사업 추진(15개 지역 110억 원 지원) ② 사교육비 지출은 오히려 늘어나 이와 같이 참여정부는 사교육비 경감에 주안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하였다. 참여정부는 EBS 수능 강의 실시로 2004년과 2005년의 경우 사교육비 감소효과가 다소간 나타난 것으로 발표하였다. EBS 수능 강의는 지역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교육 요구해소 및 EBS 수능강의자료의 수업에 활용하는 등 일정 부분 긍정적으로 기여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각종 대책들이 사교육비 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뒤따른다. 참여정부의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부모의 사교육 투자비용은 계속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007년 8월 21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사교육의 효과, 수요 및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도시가계연보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초·중·고등학교 재학생을 둔 가정이 한 달 개인교습, 입시 및 보습학원, 예체능계 학원, 참고서 구입 등에 지출하는 사교육비는 평균 21만 5천원이었다. 이 같은 지출 규모는 월평균 총 소비와 소득의 각각 9.9%, 7.5%, 가구당 전체 교육비의 65%에 달하는 수준이다. 또한 98년의 10만 4천원과 비교해서는 5년 동안 연평균 25%씩 급증했고, 총 교육비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98년 44%에서 2003년 65%로 20%포인트 이상 늘었다. 전체 조사대상 가구 중 사교육 참여 가구의 비율도 99년 66%, 2000년 76%, 2002년 83%, 2003년 85% 등으로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가구의 소득 및 소비 형편에 따른 사교육비 지출 격차도 상당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우선 2003년 기준 소득 10분위 가운데 상위 10% 가구(10분위)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40만 7천원으로 하위 10%가구(1분위) 8만5천원의 4.8배에 달했다. 소비 기준으로는 10분위의 사교육비가 48만원으로 1분위 6만원의 8배로, 차이가 더 뚜렷했다. 특히 소비 10분위와 1분위의 사교육비 격차는 이 두 그룹의 소비지출 평균값 차이(4.5배)를 크게 웃돌아 소비가 늘어날수록 총교육비 대비 사교육비 비중이 커지는 것으로 분석하였다. 이처럼 공교육 강화를 위한 전략 중 하나인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초·중등교육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처방책의 특성을 지닌다. 참여정부의 사교육비 경감대책이 실질적인 사교육비 비용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사교육에 대응한 공교육의 활성화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등학교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은 참여정부 출범 당시에 비해 저소득층과 소외계층, 소외지역 등의 학생들이 교육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2006년 9월 5일 농산어촌의 방과 후 학교 활성화를 위하여 특별교부금 지원 대상 지역으로 경기(여주), 강원(홍천), 충북(단양, 진천), 충남(부여, 서천, 태안, 연기), 전북(완주, 장수, 순창), 전남(곡성, 구례), 경북(영덕, 칠곡), 경남(거창, 합천), 인천(강화), 울산(울주)의 19지역을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대책이 중등교육의 비용 효과 면에서 효율성과 실효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교육경쟁력 차원에서 수월성 및 영재교육에 적정하게 투자했는지에 대한 엄밀한 평가가 요청된다.
참여정부가 이제 임기를 몇 달 앞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임기가 있는 직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명확히 하여 그것을 수행하고, 다음 과제를 차기에 물려주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특히 정부 혹은 국가 수준에서의 일은 이러한 연속성을 전제로 일이 설정되고 추진된다. 따라서 어떤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설정된 임무를 얼마나 달성하였으며, 차기 정부에 어떠한 과제를 물려주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어떤 정부가 임기 중에 이룩한 것이 분명하고 뚜렷하면 그것에 대한 평가도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비교적 용이할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이룩하였는지에 대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오히려 참여정부 집권기간 동안 여러 정책을 둘러싸고 논쟁과 갈등 그리고 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참여정부 자신이 갈등과 논쟁의 한복판에 당사자로 서 있는 적이 많았다. 이러한 양상은 교육 분야뿐만 아니라 국정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동일하였다. 따라서 참여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무엇을 달성하였는가에 대한 평가의 비중보다는, 정책적 의도가 무엇이었으며 왜 혼란과 갈등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그리고 차기에 어떠한 과제를 남겨두었는지에 대한 비중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는 먼저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이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정책의 내용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고, 이 정책을 둘러싸고 혼란과 갈등이 왜 그리고 어떻게 불거지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이 이룩한 성과를 짚어보고, 남겨 놓은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의 역사적 위치 국가 및 정부의 정책 중에서 정책적 연속성과 일관성이 가장 중시되고, 또 장기적 전망 속에서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할 분야는 교육 분야일 것이다. 교육을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하는 것은 교육 분야의 이러한 성격을 잘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문민정부 이전의 교육정책은 초·중등 및 직업 교육에 중점이 두어졌으며 고등교육정책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다(한영환, 1998). 고등교육개혁을 위한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문민정부에 의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의 수립(1차보고서)에 의해서인데, 여기서는 대학교육의 다양화·특성화(대학설립준칙주의, 단설대학원설치 허용 등)를 최우선 순위에 두었으며, 현안문제로서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학입학제도(학생선발제도 자율화, 종합생활기록부 활용 등)를 제안하였다(이석열, 2004). 이후에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는 3차례에 걸쳐 개혁방안을 수립하고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지금까지도 이것의 연장선에서 개혁이 추진되고 있으며(신현석, 2003), 문민정부에 의해 대학교육의 양적 성장이 이룩되고 다양화를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다 할 수 있겠다. 국민의 정부는 문민정부의 교육개혁기조를 그대로 계승한다고 천명하면서, 고등교육정책과 관련해서는 ‘대학경쟁력 강화’와 ‘교육복지’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 대학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립대학 구조조정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대학평가에 의한 차등적 지원 체제를 강화하였으며, 두뇌한국 21(BK 21)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교육복지 차원에서는 평생직업교육체제를 구축하고 지방대학육성과 학생복지 확대 및 학생활동 지원 사업을 추진하였다(반상진, 2005). 이렇게 국민의 정부는 대학의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고, 노동시장과 대학교육의 연계 강화를 새로운 핵심과제로 설정함으로써 대학교육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양 정부 기간 동안 지방대학의 위기는 심화되어갔으며, 대학평가와 재정지원을 연계하여 대학특성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지만, 평가지표의 문제 등으로 ‘획일적 변화’를 유도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교육의 질 향상을 강조하면서도 대학원교육에 대해서는 손을 놓았고, 지나치게 많은 개혁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초점을 흐리기도 하였으며, 고등교육개혁을 위한 예산지원체제를 확립하지 못했다(신현석, 2000). ‘경쟁력 강화’보다는 ‘형평성’ 추구 2002년 10월 23일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한국교총의 교육정책 토론회에 참석하여 “국가 교육정책의 기본방향을 교육의 형평성과 자유를 확충하는 데 두고자 한다”고 밝히고, 한 가지 더 부가하여 “우리 교육이 좀 더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강조했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노무현, 2002). 참여정부는 국정목표를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로 삼고, 교육 분야의 국정과제를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으로 내걸고, ‘교육적 가치로서 교육복지 확대’, ‘실질적 교육민주화를 통한 교육공동체 구축’, ‘교육의 공공성 강화와 내실화’라는 3대 교육정책 기조를 설정하였다(성병창, 2003). 그런데 참여정부의 3대 교육정책 기조는 노무현 후보가 교총 토론회에서 주장한 3가지 기본 방향에서 ‘자유의 확충’이 사라진 반면, 오히려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교육의 공공성 강화’가 추가되었다. 요컨대 후보로서 공약과 정권인수위원회의 국정과제 설정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즉, 교육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갈등과 논란이 정책기조 설정 단계에서부터 배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참여정부 교육정책의 기조에서는 문민정부 및 국민의 정부가 일관되게 강조해오던 ‘교육경쟁력 강화’와 관련한 정책이 빠져버리고, 교육의 형평성 추구와 관련된 정책만으로 3가지 정책기조로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이 교육의 일관성과 계속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정책을 둘러싼 빈번한 혼선 참여정부의 초대 교육수장인 윤덕홍 부총리는 2003년 하계 대학 총장 세미나에서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세계적 수준의 대학교육·연구 역량 확충’과 ‘지역발전을 선도하는 핵심주체로서 지방대학 육성’의 2가지였다. 그리고 전자를 위해서는 대학 자율화의 계속 추진, 우수 RD인력 양성과 기초학문 인프라 구축, 전문대학원체제 정착 등 6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후자를 위해서는 지역인재 육성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한편, 대학구조조정과 산학협력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윤덕홍, 2003). 그런데 이러한 교육부총리의 고등교육정책 방향은 역대 정부의 고등교육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참여정부의 3가지 교육정책 기조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교육부총리의 정책방향과 정권인수위의 정책기조 사이에 발견되는 괴리는 참여정부 교육정책의 혼란을 예고케 했다. 즉, 참여정부에서만 교육부총리가 5차례나 교체되는 등 교육정책을 둘러싼 빈번한 혼선은 정권 출범 때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제 참여정부의 교육정책기조에 따라 실제로 실행된 교육정책에 대해 검토해보면서 정책을 둘러싼 혼선과 갈등의 원인도 살펴보도록 하자. 근본적 검토 필요한 ‘3불 정책’ 첫 번째 정책기조로서 내세운 ‘교육복지의 확대’와 관련하여 시행한 대학교육정책으로서는 학벌타파와 대학서열완화를 목표로 한 ‘3불 정책’과 지방대학육성을 목표로 한 NURI(지방대학혁신역량강화사업)의 2가지를 들 수 있다. 여기서 3불 정책은 국민적 갈등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취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학벌타파와 대학서열완화가 정부의 교육정책을 통해 접근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NURI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 중요한 대학정책의 하나로 설정하였지만 구체화되지 못하였던 것이 주요 정책으로 입안되어 추진 중에 있는 국책사업이다. 그 성공 여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지만 큰 논란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추진되고 있는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정책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정책기조인 ‘교육공동체 구축’과 관련하여 추진한 정책으로서는 사학법 개정 등을 통해 대학의 지배구조에 대학구성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초·중등교육에서 학생회, 교사회, 학부회의 법제화와 이들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와 맥을 같이 하여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선 공약 사항이기는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에 반한다는 인식도 있어 국민들 사이에 격심한 이견과 갈등이 노출되었다. 세 번째 정책기조인 교육의 공공성 강화와 관련한 교육정책으로서는 평준화 정책의 기조유지와 유아교육의 공교육화 및 교원의 전문성 신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고등교육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없다(이명희, 2005). 그리고 위의 3가지 교육정책 기조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참여정부 하에서도 대학의 구조조정 사업은 큰 성과는 없었지만 계속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며, 대학평가사업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또한 대학에게 운영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조치도 있었고, 법학전문대학원 설립과 국립대학 법인화도 추진 중에 있으며, 제주도 및 인천송도의 특구에서 교육개방을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조치들은 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문민정부 이래 국민의 정부도 공통적으로 추진하던 사업들이다. 그 결과 일부 단체 등에서는 “평준화 정책, 교육개방, 고등교육 정책 분야에서 경제정책이 교육정책을 결정하고, 경제원리가 교육원리를 대체하는 상황은 (참여정부의) 교육철학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한만중, 2003)라고 참여정부의 고등교육정책을 이념차원에서 전면 비판하기도 한다. 반면에 또 다른 측에서는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은) 기본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교육의 수월성 추구에는 힘을 쏟지 못하고 평등정책에 치중해 왔다. 이러한 기조는 대학정책에도 이어져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드는 것보다 대학을 평준화하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서정화, 2006)고 노무현 정부의 정책적 일탈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참여정부의 교육정책과 관련한 논란은 평가를 둘러싸고도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학생선발 과정의 간섭은 획일적 통제 교육은 전 국민의 관심사다. 교육정책의 추진과 관련해서는 국민 각계의 다양한 입장이 표출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부의 조정기능이 매우 중요하다. 국민의 정부 이래 평준화 문제 등 주요 교육정책을 둘러싸고 이념적 갈등이 반복되고 있으며, 현 정부 들어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정부의 국민 통합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며, 정부의 조정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증좌이다. 따라서 국민통합을 위한 정책조정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현 정부가 차기정부에 남겨 놓은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를 위한 대원칙부터 제안하고자 한다. 즉, 교육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과정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치는 헌법이 추구하는 기본가치이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개인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세계인으로서 살아가는데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다. 따라서 국민통합과 정책조정을 위한 기본적인 기준이 되는 가치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은 헌법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에 합치하여야 하며, 그 기본 원리를 벗어나서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 차기정부는 정부로서 능히 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여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 예를 들면, 학벌타파와 대학서열완화와 같은 목표는 바람직한 것일 수는 있으나, 한 정부의 정책으로서 접근하여 능히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운동을 통해 접근될 수는 있으나, 정부정책으로서는 학벌이나 대학서열의 강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정부는 투입이나 과정에 대해 관여하기보다는, 항상 결과에 주목하여 질을 관리하고 통제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정부는 제 아무리 유연성을 발휘하더라도 현대사회의 변화에 따라갈 수 없으며, 굳이 투입이나 과정에 개입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획일적 통제와 비효율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아무리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대학입시의 구체적 방법’과 같은 교육 과정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정부가 질 높은 고등교육을 원한다면 결과라고 할 수 있는 학위논문이나 졸업생의 취직이라는 마지막 산출의 질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고등교육 예산확보가 과제 넷째, 정부가 투입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은 2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투입의 우선순위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정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일이다. 문민정부 이래 연속성과 일관성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정책과 관련해서 최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것은 대학의 세계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각 대학들이 특성화할 수 있도록 구조조정을 유도한다든가 지방대학을 육성하는 것, 그리고 전문 직업교육을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 수립 등을 다음 순위들에 둘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개혁에 투입해야 할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다. 역대정부는 대학개혁을 위한 정책만 수립했지 이를 위한 예산을 제대로 확보한 적이 없다. 어쩌면 차기정부가 고등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개혁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여정부 하의 사학법은 개정 사학법과 재개정 사학법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 쉽다. 주지하다시피 개정 사학법이란 부패사학 척결을 위하여 참여정부가 진통 끝에 지난 2005년 12월 9일에 전면 개정한 사학법을 말한다. 또한 재개정 사학법이란 개정 사학법에 대해서 사학측이 집단 반발함에 따라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국회가 금년 7월 3일 개정사학법을 다시 개정한 사학법을 말한다. 참여정부 하의 사학법 개정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사학법의 개정 혹은 재개정 내용 자체를 평가하라는 의미일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개정 혹은 재개정에 관여한 참여정부와 여당의 책임을 물어달라는 의미일 수 있다. 필자의 전공이 법학인 만큼 전자의 작업은 비교적 용이하지만 후자의 작업은 보다 정밀하고 입체적인 작업이 필요하여 단기에 해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전자의 접근 방법에 따라서 개정 사학법과 재개정 사학법에 대한 법적 평가를 위주로 해보기로 한다. 지면 관계상 여러 가지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사학법의 전면 개정과 재개정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경과를 간단히 덧붙이기로 한다. 여당의 사학법 강행처리 사학법의 개정과 재개정 과정은 찬반 세력의 극심한 대립과 다툼을 유발하였다. 부패사학 척결을 위한 사학법의 전면 개정 운동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10월 교육관련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사립학교법 개정과 부패사학 척결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처음으로 사립학교법 전면 개정안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4월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사학법 개정안은 물론 교수회를 대학의 공식기구로 규정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함께 발의하였다. 그러나 개정 작업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하였다. 이듬해인 2002년 12월 민주당은 대선정국을 맞아 “사립학교법을 전향적으로 개정하여 사학운영의 민주성과 투명성 및 공공성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하는 공약을 채택하였다. 참여정부 하에서 사학법 개정이 정부와 여당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이 공약 때문이다. 2003년 4월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교육부는 2003년도 업무보고에서 사학의 투명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할 것을 대통령께 보고하였다. 2004년 4월 17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새로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정부의 개정안을 수용하여 사립학교법을 전향적으로 개정하겠다는 공약을 다시 하였다. 한나라당은 그 반대로 사립대학 운영비의 10%까지 국고지원을 확대하고 사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사학진흥법을 제정하되, 사립학교법 개정은 반대하는 정반대의 공약을 내놓게 된다. 선거 결과 야당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도에 대한 국민들의 견제심리 작용 등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사학법 개정은 탄력을 받게 된다. 결국 이 힘으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개정을 밀어붙여 마침내 야당과 사학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5년 12월 9일 기습적인 야당 봉쇄작전을 구사하며 사학법 개정안을 국회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하여 강행처리하였다. 야당, 사학계 반대로 재개정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은 사학법 개정 무효화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사학계와 종교계는 휴교 및 학교폐쇄 예고 투쟁 및 사학법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헌법소원 등의 법적 투쟁을 시도하였다. 금년 들어서 다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7대 국회의 현안들을 매듭짓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여야가 사학법 개정에 대한 부담을 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결과, 지난 7월 3일 여야의 합의로 사학계 주장의 일부를 반영하는 재개정안을 상정하여 민주노동당의 반대를 뒤로 한 채 관철시키게 되었다. 여기에서 개정 사학법과 재개정 사학법의 내용을 각각 일별하고 이를 필자의 관점에서 평가해본다. 2005년 12월의 사학법 개정은 개정안에 따르면 “사립학교운영의 민주성과 투명성 및 공공성을 제고하여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개선·보완하려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학교법인의 이사 정수의 4분의 1 이상은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가 2배수 추천하는 인사 중에서 선임한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이사가 7명이면 2명이 개방형 이사가 된다. 비리 등으로 이사 취임이 취소된 인사는 요건을 강화하여 복귀가 어렵도록 하였다. 감사 2명 중 1명도 학운위나 대학평의원회에서 추천받은 인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또 이사장은 당해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학교의 장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법인의 이사장 또는 그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사장 친족의 이사 참여도 종전보다 더욱 제한하여 4분의 1까지만 허용하였다. 학교회계의 예산은 당해 학교의 장이 편성하되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의 자문을 거친 후 이사회의 심의·의결로 확정하도록 한다. 사립학교 교원의 면직사유에서 노동운동을 한 경우를 제외한다. 공립과 마찬가지로 사학의 학교장에게도 임기제를 도입하여 4년 중임에 그치도록 하였으며, 교원채용 시 공개전형에 의하도록 하였다. 통제냐, 개혁의 기틀이냐 사학법이 개정되었지만 바로 시행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그것을 시행하기 위한 시행령의 개정이 필요하여 개정 법률은 2006년 7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2005년의 개정 사학법에 대한 여야 정당 및 관련 단체들의 입장은 당연히 크게 찬반의 두 갈래로 갈라진 바 있다. 한쪽에서는 개정안이 비리사학뿐만 아니라 건전사학까지 일률적으로 규제를 가함으로써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법 개정이 기대에 미흡하기는 하지만 이로써 부패사학을 개혁하고 정상화하기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역사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하고 있다. 필자는 이 개정의 전체 방향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모든 사회에는 구성원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이 요청된다. 그런 점에서 학내의 관련 기구를 통한 학교운영 참여 기회 보장은 필요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정 법률의 내용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용 중에 헌법상의 기본권 제한에서의 비례의 원칙에 충실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사안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예컨대, 법인 이사장의 학교장 겸직 금지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한 것이다. 사학의 학교장 임기를 국공립학교와 동일하게 4년 중임으로 제한한 것도 설득력이 약한 것이다. 간과하기 쉬운 문제였지만 사립대학에 일률적으로 대학평의원회를 두게 한 것도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 것이다. 아울러 그 기구의 기능, 조직, 운영 등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대통령령에 위임한 것도 포괄적 위임 입법 금지 원칙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한다. 교원채용 시 공개 전형에 의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지만 종립학교의 경우 그 특수성을 보장하는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007년의 재개정 사학법은 교육계와 학계의 이러한 지적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 법은 학교법인 이사장의 겸직금지의무 등을 완화하여 개인의 직업선택권 등 기본권 침해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는 한편, 사학현장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개방이사의 추천방법에 학교법인의 관여를 일부 허용하기로 하는 등 현행 제도의 운영상 나타난 일부 미비점을 개선·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재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방형이사제, 여전히 논란의 중심 첫째, 개방이사추천위원회의 설치(법 제14조 제3항 및 제4항) : 대학평의원회 또는 학교운영위원회에 개방이사추천위원회를 두고 학교법인의 이사정수의 4분의 1을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2배수 추천한 인사 중에서 선임하도록 하며, 개방이사추천위원회의 위원정수는 5인 이상 홀수로 하되, 대학평의원회 또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개방이사추천위원회 위원의 2분의 1을 추천하도록 함. 둘째, 학교법인 이사장의 겸직금지의무 완화(법 제23조 제1항) : 종전에는 학교법인의 이사장은 당해 학교법인 및 다른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이나 다른 학교법인의 이사장을 겸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당해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만을 겸할 수 없도록 하고, 이 경우에도 유치원만을 설치·경영하는 학교법인의 이사장은 당해 유치원장을 겸할 수 있도록 함. 셋째, 사학분쟁조정위원회(법 제24조의2 및 제24조의3 신설) : 임시이사의 선임·해임과 임시이사가 선임된 학교법인의 정상화 방안 등을 심의하기 위하여 교육부장관 소속으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두고,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위원은 대통령이 3인, 국회의장이 3인, 대법원장이 5인을 각각 추천하도록 함. 넷째, 대학평의원회의 기능 조정(법 제26조의2 제1항) : 대학평의원회의 기능 중 대학헌장의 제정 또는 개정과 대학교육과정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대학평의원회의 심의사항에서 자문사항으로 변경함. 다섯째, 각급 학교의 장의 중임제한 완화(법 제53조 제3항) : 종전에는 각급 학교의 장의 임기는 4년을 초과할 수 없고 1회에 한하여 중임을 허용하였으나, 앞으로는 횟수 제한 없이 중임을 허용하되, 초·중등학교의 장은 1회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도록 함. 여섯째, 학교법인 이사장의 배우자 등에 대한 학교의 장의 임명제한 완화(법 제54조의3 제3항) : 종전에는 학교법인의 이사장과 그 배우자 또는 직계존속 및 직계비속과 그 배우자의 관계에 있는 자는 당해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에 임명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이사정수의 3분의 2 이상 찬성과 관할청의 승인을 받은 자는 예외로 하도록 함.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학법 다툼 개정사학법의 이와 같은 재개정으로 그동안 지적된 개정 사학법의 문제들은 일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각급 학교장의 중임제한을 완화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초·중등학교의 장은 종전과 동일하게 제한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문제가 있다. 사학법 개정을 둘러싼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보도에 의하면 사학법인 측은 조만간 재개정 사립학교법에 대해서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학 측의 이 결정은 재개정 사학법도 수용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사학측이 재개정된 사학법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는 이 법도 그 추천 방법만 달리 했을 뿐 여전히 개방형이사제를 두고 있는데, 그것 자체가 사학의 학교설치운영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며, 임시이사제 또한 교육부와 산하 사학법인분쟁조정위원회 주도하에 운영되도록 해 사학 측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높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원인사위원회의 교원 임면 등 인사에 관한 심의기구화 조항도 사학의 인사권을 명백히 침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다. 생각건대, 재개정 사학법에 대해서 사학측이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하더라도 헌법상 쟁점은 개정 사학법 때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의 핵심은 헌법 제37조가 “기본권은 보장을 최대로 하고 제한을 최소로 하도록” 천명하고 있는데, 재개정 사학법은 과연 그 규제 방법상 이것이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사학의 경영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그 제한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 판단의 향방은 사학은 국공립학교와 달리 그 특수성과 자주성이 공공성보다 더 강조되는 것이지만, 학교는 경영만이 아니라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중성을 띤 곳이므로 사학의 자율성도 법인만의 자율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구성원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사학법 개정 문제가 하루 속히 매듭지어져서 학생들의 학습권이 재대로 보장되는 안정을 되찾기를 기대해본다.
1997년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회 상정과 폐기를 거듭해 오던 유아교육법안이 2004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같은 해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법률로서 공포함으로써 참여정부에 들어서 비로소 유아교육법이 제정되었다. 유아교육을 개인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 유아교사의 자격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며 양성과 임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와 같이 한 국가가 어떠한 유아교육정책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유아교육의 방향은 많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또한 여러 가지 선택이 가능한 유아교육정책 중에서 어떤 특정한 정책이 채택되면 이 정책을 일정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려는 국가적 의도가 나타나는데, 이런 결과로 형성되는 것이 유아교육법이다(이윤경 · 이일주 · 윤은주, 2005).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참여정부가 수립된 지 1년도 채 안되어 유아교육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유아교육은 새로 제정된 유아교육법에 의하여 2년 8개월 정도 행하여지고 있으므로 현재 시점에서 참여정부의 유아교육법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다소 이른 감은 있다. 그러나 유아교육법은 유아교육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이루어져 온 우리나라 유아교육에 대한 핵심 정책에 대한 논쟁점에 대한 합의적 성격이 있다고 볼 때, 유아교육법 제정 초기 정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아교육법 평가 준거는 몇 가지 관점에서 설정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참여정부의 유아교육에 대한 대 국민 약속인 제16대 대통령 선거공약과 유아교육법의 제정과 시행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였던 국가의 정책의지 및 그 방향을 담고 있는 유아교육법 입법취지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림 1과 같이 평가준거를 설정하였다. (그림 1 참여정부 유아교육법 정책 평가 준거 새교육 10월호 참조) 참여정부가 유아교육법 제정을 통하여 추진한 주요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해본 결과 만 3〜5세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교육 및 보육법의 이원화 및 만 5세 초등학교 전면 취학안 추진, 보육 중시 정책에 의한 유아교육기회 확대 성과 미흡 등 전체적으로는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러나 장기간 표류하였던 유아교육법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정하였고, 만 3, 4세 저소득층 유아교육비 지원 정책 신설 추진 등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아교육 기간 학제화 못해 유아교육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유아교육의 기본적인 사항은 초·중등교육법에 규정하고, 유아교육의 지원·육성에 관한 사항은 유아교육진흥법에 규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유아교육의 일부 사항만이 기본법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원·육성에 관한 사항도 한시법이 지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참여정부에 들어 유아교육법을 제정함으로써 해소되었으며, 헌법 제31조→ 교육기본법 제9조→ 유아교육법으로 이어지는 유아교육 법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아교육 법체계가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교육단계가 기간학제로 포함되지 않고 있는 것은 종전의 유아교육체제가 지녔던 가장 큰 문제점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아교육법 제11조에 의하여 ‘만 3세부터 초등학교 취학 전까지의 어린이’를 유치원의 입학연령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만 3〜5세 유아’의 경우 유아교육법에 의한 ‘유아교육’과 영유아보육법에 의한 ‘보육’으로 이원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유아교육의 기간학제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 뿐만이 아니라 2006년에는 참여정부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비전 2030’에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현재보다 1년을 낮추어 만 5세를 초등학교에 전면 취학시키는 방안을 발표하였으며, 2007년 2월 5일에는 만 5세의 초등학교 취학을 전제로 하는 ‘인적자원 활용 2+5전략’을 정부와 여당에서 발표하였다. 이로써 참여정부가 ‘유아교육을 공교육체제로 전환하고, 유아(만 3세)부터 국가 인적자원 관리체계를 확립하겠다’고 하였던 공약과 유아교육법 입법취지를 스스로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유아교육기회 확대 성과 미흡 유아교육법이 제정됨으로써 유아교육 공교육체제 구축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유아들은 보다 질적 수준이 높은 유아교육기관에서 균형적이고 조화로운 발달을 조장하는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유아교육법 제정의 중요한 의의로 평가 받았다(이원영, 2004). 이러한 평가의 관점에서 일반 국민, 특히 유아를 자녀로 두고 있는 부모들에게는 ‘적은 부담으로 질 좋은 유치원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충분한 유아교육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기대를 하기에는 아직도 시기가 이르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표 1 유아교육법 제정 전·후 유아교육 및 보육 현황 비교 새교육 10월호 참조) 표 1은 유아교육과 보육에 직접 영향을 미친 유아교육법 제정과 영유아보육법 개정이 공포된 2004년과 처음 시행된 2005년을 제외하고, 가장 인접한 년도인 2003년과 2006년도를 살펴 본 것이므로, 유아교육법 제정 전·후의 유아교육 및 보육 현황을 극명하게 비교할 수 있다. 표 1에서 보면 유아교육법 제정 후에 획기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유치원은 그 규모면에서 오히려 감소추세로 들어섰음(특히 사립유치원)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아교육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영유아보육법에서 모든 영유아에게 보육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오히려 유아교육의 기회는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유치원교육과 보육의 균등발전이라고 하는 당초 유아교육법 제정 및 영유아보육법개정의 취지인 형평성이 깨진 것이다(이일주, 2006). 유아교육비 지원 확대 참여정부에서는 1999년부터 시행하여 온 ‘만 5세아 무상교육’ 확대 정책과 함께 ‘교육복지 투자우선지역 지원’(2003년 이후), ‘만 3, 4세아 차등교육비 지원’, ‘장애유아 학비 무상지원’, ‘농산어촌 교육여건 개선’(이상 2004년 이후) 정책과 ‘두자녀 이상 교육비 지원’(2005년 이후) 정책 등을 신규로 발굴 시행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시행을 통하여 4.1%에 불과하였던 1999년의 무상교육 수혜율이 2005년에는 13.2%(80,880명)로 증가하였고, 2006년에는 14만 2476명의 유아들에게 무상교육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만 3, 4세아 교육비 지원규모는 2004년 2만 2000명(1.8%), 2005년 3만 2000명(2.8%)을 거쳐 2006년에는 77,540백만원을 투입하여 모두 15만 5258명의 유아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함으로써(교육부, 2005; 2006) 유아교육법 시행효과를 거양한 것은 참여정부의 성과이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참여정부에서 지원한 유아교육비 규모를 보육비 지원규모와 비교하여 보면 유아교육비 지원이 순수하게 유아교육법의 제정에 의한 효과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아교육법 제정 전인 2003년에는 8413억원에 불과하였던 유아교육 및 보육예산(국비 및 지방비)이 유아교육법 제정 후인 2007년에는 3조 2459억원에 달하여 최근 4년 사이에 무려 385%가 증액되었다. 한편 유아교육법 제정 전·후(2003년 대비 2006년)의 유아교육 및 보육 수혜 비용으로 다시 환산해 보면 표 2와 같다. (표 2유아교육법 제정 전·후의 유아교육 및 보육 수혜 비용 비교 새교육 10월호 참조) 표 2를 통하여 수혜자 1인당 수혜비용을 비교하여 보면 2003년에는 유치원아 1인당 평균 74만원 정도였던 유아교육 수혜비용이 2006년에는 162만원으로 220% 증액되었는데, 보육 수혜비용은 2003년에 영유아 1인당 평균 51만원이었던 보육 수혜 비용은 2006년에 들어 202만원으로 무려 400%가 증액된 변화를 가져왔다. 유치원과 보육시설의 취원 및 입소 연령이 다소 다르고, 부분적으로 종일제를 운영하는 유치원과 종일제를 원칙으로 하는 보육시설의 연령별 표준교육비와 표준보육비가 다르기 때문에 표 2에서 산출된 수치를 절대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추세대로 비용지원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앞으로 이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 틀림없다(이일주, 2007). 이와 같이 유아교육예산과 보육예산 간의 격차가 커지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보육을 관장하는 정부부처가 종전 보건복지부에서 2004년 6월에 여성가족부로 이관되면서 매년 보육예산이 증액되어 1조 1204억원인 2007년 여성가족부 예산 중 보육예산이 1조 446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93%를 차지함으로써 ‘여성가족부는 보육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육예산의 확충이 괄목할 만 하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유아교육과 보육을 저출산 고령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육아지원정책으로 접근하여 현재는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아교육법에 명시한 교육비용 지원정책을 보육 및 저출산 대비 정책과 연계하여 추진하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의 무상교육(보육 포함) 성과가 8만 1000명으로 전체의 30%밖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만 5세 무상교육의 3년내 완성”을 공약한(새천년민주당, 2002) 참여정부의 유아교육비 지원 정책은 그리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에서는 유아교육법시행규칙 제5조의 지원특례에 의하여 2005년부터 2년간 192개의 유아대상 미술학원에 대하여 약 40억원의 지원을 하였다. 유아대상 미술학원 중 유치원으로의 전환을 희망하는 학원에 한하여 지원토록 되어 있는데도 유아교육비용을 지원받은 학원 중 유치원 전환을 희망하는 곳은 단 28개원(14.6%)에 불과하였는데 당초 2007년 2월까지 한시 적용되도록 규정하였던 특례조항을 참여정부에서는 오히려 2년을 연장하는 유아교육법시행규칙을 개정함으로써 유아교육계로부터 감사청구를 당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유아교육발전을위한유아교육대표자연대, 2007). ‘유아교육’과 ‘보육’ 통합 법 제정 필요 이상에서 참여정부가 유아교육법 제정을 통하여 추진한 주요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해본 결과 만 3〜5세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교육 및 보육법의 이원화 및 만 5세 초등학교 전면 취학안 추진, 보육 중시 정책에 의한 유아교육기회 확대 성과 미흡 등 전체적으로는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러나 장기간 표류하였던 유아교육법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정하였고, 만 3, 4세 저소득층 유아교육비 지원 정책 신설 추진 등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바뀌어도 유아교육법의 입법취지는 변할 수 없는 것이므로 참여정부에서 해결하지 못한 정책은 차기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우선 차기정부에서는 참여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만 5세 초등학교 취학안을 폐기하고, 만3세부터 5세까지를 하나의 교육단계로 묶어 완전한 기간학제로 확립하여야 하며, 일제의 잔재인 ‘유치원’이라는 명칭을 유아교육의 기간학제화 및 세계적인 동향에 맞도록 ‘유아학교’로 변경하고, 부족한 유아교육예산을 사교육기관인 유아대상 학원에 지원토록 규정한 유아교육법 시행규칙 제5조를 삭제하는 등 유아교육법 제정 당시부터 과제로 남겨져 있던 문제점을 해결하는 한편 유아교육법과 영유아보육법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유아교육 법체계를 스웨덴 등과 같이 통합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시 나타난 처용 9월이나 10월이면 지역별로 각종 축제가 많이 열립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작물을 가을에 수확하듯 각 지역 축제도 이 시기에 특히 많이 개최되는데요, 필자가 살고 있는 울산에도 처용문화제가 개최됩니다. 처용문화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처용이 나타난 처용암이 울산 앞바다 개운포에 있다는 데 바탕합니다. 처용설화 중 처용가에 나타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 처용문화제의 취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와 달리 축제 이름에서 ‘처용’을 빼야 한다는 논란이 공개적으로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처용가의 내용이 외설적이기 때문에 처용문화제에서 주장하는 관용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과연 처용가가 외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지역의 대표 축제에서 그의 이름을 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다만 축제 이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 논란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처용, 잊혀졌던 처용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처용,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그의 궤적을 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개운포 처용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대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지요. 이 때 그는 울산 앞바다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헌강왕대는 신라 말기로 중앙 귀족들의 퇴폐와 향락이 극심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당시의 어려웠던 형편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정은 처용설화에 이어 기록되어 있는 헌강왕의 또다른 행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오직 왕에게만 그 모습이 보였다거나,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들이 곧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계하던 춤이었다고 보죠. 왕이 신하들과 함께 돌아가려는데 갑자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 어찌된 연유인지 신하들에게 물어본즉, 일관(日官)이 이르기를 이것은 동해 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헌강왕이 다녀갔던 그 울산 바닷가, 처용이 나타난 그 바닷가를 개운포(開雲浦)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 용을 위해 지은 절은 이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고 하여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습니다. 헌강왕이 왜 개운포로 내려갔을까요?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내려간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지방순시를 통해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 절을 창건함으로써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해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고요. 신라 말기에는 이렇게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문수보살에게 묻기 위하여 태화사라는 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이 때 문수보살은 왕을 눈앞에 두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문수보살의 뜻으로 알고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긴다는 그런 류의 전설이지요. 망해사에서는 과연 바다가 보일까? 개운포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군이 머물렀던 영성(營城)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이야기대로라면 망해사는 개운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망해사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발돋움을 해봐도 공단에 가려져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절은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망해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제 망해사는 말 그대로 바로 앞이 서해 바다이니까요. 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 자락에 위치한 절입니다. 지금 망해사에서 처용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보라면 근래 지어진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정도일 뿐입니다. 벽화에는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내려왔을 때 갑자기 운무가 자욱한 모습, 동해 용이 나타나는 모습, 망해사 절을 짓는 모습,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부도를 만드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가 둘 남아 있습니다. 상륜부는 떨어져 나간 팔각 원당형의 부도탑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보기 드문 쌍둥이 부도로서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혹시 처용과 관련한 답사지로 이곳을 찾았다면 처용암이 있는 개운포 바다가 보이지 않음에 실망하지 마시고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었을 이 부도탑을 통해서 그를 떠올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동해용은 왕이 절을 지어준다는 그 말에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그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왕을 따라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었습니다. 처용암은 처용이 등장한 바위를 말하죠. 앞서 언급한 처용문화제의 시작은 처용암 앞에서 펼쳐지는 처용에 대한 제의(祭儀)에서 시작합니다. 시장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인사들이 제의에 참여하며, 이 때 처용탈을 쓴 채 처용무가 한 판 벌어집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처용암을 한 바퀴 둘러봄으로써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용암에서 등장한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 후 미녀를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라는 벼슬도 받게 됩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제 울산에서 경주로 바뀝니다. 처용은 왜 그 노래를 불렀을까? 처용의 아내가 너무 예뻐서일까요?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처용이 없는 틈을 타 그녀와 동침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용을 둘러싼 논란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모습을 보고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일반적으로 한바탕 난리를 부리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노라고 겁을 주었을 텐데,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가 부른 처용가는 해석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아내의 것이고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 아내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겼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 노래를 들은 역신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으며 하는 말이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역신은 질병을 옮기는 신으로 대표되기도 하고, 왕과 대립되는 기득권 세력을 말한다고도 합니다. 또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환락과 타락을 나타낸다고도 보기도 합니다. 처용가의 내용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외설입니다. 처용이 외출한 사이 처용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은 분명 지탄의 대상이지 관용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에서는 역신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곤란하고 처용의 아내를 덮친 역병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용이 아내와 동침한 역신을 춤과 노래 등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관용정신과 화합정신을 본받을 만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말 그대로 유사(遺事)입니다. 짧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자로 적힌 그 글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은유의 의미를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은유와 과장의 표현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또 처용설화에서 유래한 처용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실리고 이후 궁중의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춤입니다. 처용이 가지는 ‘벽사진경’, 즉 악귀를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한다는 정신이 반영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처용설화의 핵심이 외설이었다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그것도 신성한 왕실에서 행하는 행사 때 처용무가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나름대로의 판단이 궁금하네요. 괘릉에서 처용을 그리다 처용에 대해 나와 있는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처용이 누구냐에 대한 다양한 논란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그가 서역에서 온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의견은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악학궤범에 나타난 생김새가 우리네 얼굴과는 많이 다른 서역의 인물에 가깝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받는 곳이 바로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경주 괘릉입니다. 괘릉에는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배치되어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다른 신라의 왕릉과는 차별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무인상은 서역인을 닮아서 어떻게 신라시대 왕릉에 서역인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중세 아랍 사람들에게 신라는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섬과 함께 동방의 이상향이었다고 합니다. 뜨거운 열기와 척박한 자연 환경에 처한 그들에게 신라 땅은 산수 좋고 기름진 곳이었고 심지어 개 사슬도 금붙이로 만들어 다닌다는 소문이 날 만큼 황금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아랍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남해의 바닷길로 무역을 거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처용은 바다를 통해 울산으로 들어온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다분히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부는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가 벼슬은 있으나 세력이 약한 귀화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려속요 ‘쌍화점’은 서역에서 건너온 이슬람 사람들이 이 땅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도 괘릉의 무인석과 같은 형태의 토용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서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귀화하여 하사받은 성씨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서 가끔씩 높다란 콧대에 우락부락한 서역인의 골격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듯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실크로드 답사 중입니다. 서안을 출발해서 우루무치로 가는 여정에서 중국 내 박물관에서 만나는 토용으로, 양고기를 구워 파는 위구르인의 모습에서 괘릉의 무인석을 떠올리고 있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저더러 이쪽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혹시 제게도 처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 좋은 가을에 가까운 축제에 참여해 보심이 어떨지요?
지난 한해 동안 유학을 목적으로 출국한 초중고생이 3만명에 육박하는 등 조기유학생 숫자가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26일 교육인적자원부가 한국교육개발원을 통해 집계한 2006학년도 초중고 유학생 출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월1일부터 올해 2월28일까지 1년 동안 해외로 나간 유학생수는 총 2만9천511명으로 전학년도(2만400명)에 비해 44.6% 증가했다(한교닷컴, 9.26). 이렇게 조기유학에 오르는 이유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국내에서의 공교육불신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모든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기유학길에 오르기도 한다. 또한 유학후의 막연한 혜택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조기유학을 위한 출국은 지속적으로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공교육 활성화 등의 특단의 대책이 나오기 전에는 인위적으로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선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 대부분이 불법유학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현행 규정상 초, 중학생의 조기유학은 원칙적으로 허가되지 않고 있다. 국외유학에 관한 규정 제5조(자비유학자격)에서 ‘원칙적으로 자비유학의 자격은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이 있거나 이와 동등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 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중학생의 해외 조기유학의 길은 막혀있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비유학은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학생이 자비로 유학을 가는 것’을 의미하므로 중학교 재학생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규정을 준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관계당국에서 조기유학을 묵인하거나 방치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규정을 철저히 적용한다면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의 증가폭이 크다는 것은 불법적인 유학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시대가 변해가는 시점에서 조기유학과 관련된 규정을 바꾸거나 기존규정을 철저히 적용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현재처럼 묵인하에 방치해서는 안된다. 조기유학관련 규정을 완화하여 초등학교때부터 조기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위화감 조성등의 문제를 안고있다. 따라서 현재의 '중학교졸업이상'을 '초등학교졸업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방안이 어렵다면 규정을 철저히 적용해야 한다. 규정이 있으면 당연히 지켜야 하고, 이를 지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정은 있지만 그 규정이 사문화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조기유학 문제는 빠른시일내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매듭되더라도 조기유학을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인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달이 바뀌는 날은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지난달을 되돌아보게 되고 새 달을 설계하게 된다. 10월의 행사계획표를 보니 결실의 풍성한 계절답게 눈에 띄는 게 많다. 종합학예대회, 영어체험행사, 추계소풍, 발명교실 참가, 동천축제, 발명교실 참가, 봉사활동, 환경정화활동 등 많은 계획이 잡혀 있다. 이 많은 것들이 풍성한 결실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오늘은 10월 첫날이고 월요일인데도 부담없이 잘 오게 된다. 많은 생각에 잠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일까? 그렇게 썩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마음이 상쾌한 것은 10월 첫날이 주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생님들도 10월을 맞이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생님들 중에는 정말 애먹이는 학생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마다 몇 명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말을 잘 듣는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선생님이 말씀을 하면 아예 귀밖에 듣는 학생들도 있고 선생님 앞에서는 듣는 체하는 시늉을 하는 학생도 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선생님들은 울기도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고,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불면증을 앓기도 하고, 마음이 편치 못해 직장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도 보게 된다. 선생님을 괴롭히고 선생님의 말을 아예 말을 듣지 않는 막무가내의 학생들은 행동이 마음대로다. 말도 마음대로다. 태도가 엉망이다. 너무나 고집이 세다.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다. 너무나 거칠다. 너무나 난폭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다. 이러니 선생님들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속으로야 말을 듣지 않지만 겉으로는 듣는 체하고 행동을 옮기는 체라도 하는 학생들은 좀 낫다.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들은 사고를 치지도 않는다. 다투지도 않는다. 미워하지도 않는다. 만약 다투고 싸우고 하다가도 잘못을 뉘우치고 빨리 정상적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고 이런 학생들을 너무 오래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체하는 학생들을 두둔하면 계속해서 더욱 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 계시면 공부하는 체 하고, 선생님이 계시면 청소하는 체하고, 선생님이 계시면 얌전한 체하지만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공부도, 청소도, 해야 할 무엇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이런 학생들을 방치하면 나중에 가식적인 사람 만들고 만다. 거짓된 사람 만들고 만다. 이런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생님과 진정으로 통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진정 통하지 못하고 대화가 되지 않으니 그 학생과 선생님과의 관계는 발전이 없다. 믿음이 없다. 희망이 없다. 그러니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 학생, 선생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하는 학생, 무엇이든 하는 체, 무엇이든 듣는 체하는 학생들과의 필수적인 것은 대화다. 다시 말하면 통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가 올 수 있고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고치게 되고 바르게 행하게 된다. 선생님과 학생과의 막힘이 있다면 더 이상 고민하거나 힘들어하지 말고 막힘을 뚫어야 한다. 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먼저 꼬리를 내려야 한다. 선생님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선생님이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문을 열 수 있다. 그래야 막힌 담을 헐 수 있다. 10월의 달, 결실의 달에 힘들어하는 학생들로 인해 좋은 수확을 거두었으면 한다. 그 비결은 통함이다. 그 비결은 대화이다. 그 비결은 겸손함이다. 그 비결은 꼬리를 먼저 내림이다. 교육은 통함이다.
“따르르릉~~” “안녕하세요? ○○○입니다. 아시겠어요?” 갑자기 나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떨려왔다. 이게 얼마 만인가? 대학 때 몇 번 만나다가 멀어진 지 삼십 년이 지나 그의 이름 석 자도 지워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다. 우리 동네에는 나처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예비고사란 것을 치르고 발표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그 남자애가 나에게 슬그머니 쪽지를 내밀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 입구에 잠깐 나오세요”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에 만나서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때만 하여도 남녀가 분리된 도서관이어서 나는 자리에 앉아 내내 가슴을 설레며 그를 생각하면서 시계만 들여다보곤 하였다. 입시가 끝나고 우린 사진을 교환하면서 평생 간직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누나와 형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인사도 시켰다. 나도 언니에게 사진을 보여 주면서 착하고 모범생인 그의 자랑도 조금씩 늘어놓곤 했다. 언니는 피식 웃으며 ‘잘 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어떤 방법으로 만나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냥 즐거웠고 많이 웃었다는 것, 분식집과 음악 감상실도 갔었고 단발머리에서 생전 처음 커트를 치고 어색해 했던 기억들... 갓 스무 살의 우린 그렇게 하면서 각자 대학에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집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대부분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되던 때에 새내기 1학년들이 소식을 통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그의 전화가 와서는 “듣기만 해, 내일 네 시에 시민회관 앞으로 나와라”는 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그는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날을 정해 두고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계모임도 아니고 정한 날에 만나자니...’ 하는 듯한 나의 말에 머쓱했던지 그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사실 입학하기 전에는 시간도 많았고 할 일도 없어서인지 무척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만나면 될 것이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는 생각과 그리고 솔직히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만난다는 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었다. 그 때 그의 말대로 했었더라면... 그렇게 몇 번을 만나다가 미팅이다, 서클활동이다 하는 대학 생활에 젖어들면서 우리의 만남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각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뚜렷한 감정 표현도 없이 미지근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나는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었다. 만나면 어쩔 것인가? 만나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는 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잘 살고 있구나’ 하면서 자기의 얘기도 해 주었다. 나는 한 살 위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는 부인이 두 살 아래이고 아들 하나, 딸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른에, 나는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고 맏이가 우리 아이보다 두 살 적었다. 평소 직장일로 무척 바빴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잦은 야근 탓으로 가끔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때는 도대체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단다. 내가 생각해도 그는 성실하고 순수한 사람인데 아무리 부부라도 마음까지 다스릴 수 없으니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듯 싶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남남이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각자가 채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날 잊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었고 그는 내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왜 연락이 안 올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우리 사귀자’ 로 시작해서 쿨하게 헤어지는 남녀를 보면 그 때의 우리는 참으로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전화를 안 했냐고 뒤늦게나마 따져 보니 오히려 나더러 연락 없었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싱거운 옛날 이야기였다. 한참 동안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것은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다함을 슬퍼하며 물처럼 담담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철없던 시절, 모든 것이 서툴었던 우린 좋으면서 손 한 번 못 잡고 억울하게 헤어졌었다. 만약 나의 청춘에 휴대전화가 있었더라면 이러한 오해는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나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첫사랑은 보란 듯이 이루어져 자랑스런 휴대전화의 수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야속한 휴대전화여~ 나의 운명이여!
- 비오리가 희푸른 파도를 밟으며 날아오르는 곳.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로 지내다가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자를 푸른 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300년 전 조선 영조 때, 한양에서 이조참의(현 내무부 국장급, 문관의 선임과 공훈봉작을 맡았음)란 벼슬을 지내다가 졸지에 기장현감으로 좌천된 권적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암행어사인 ‘박문수’의 호남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임금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벌로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강등되고 말았다고 한다. 한양에서 떵떵거리는 고관대작 생활을 하다가 동해 남단의 보잘 것 없는 마을에 사또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울분과 서러움에 휩싸였겠는가. 권적은 기장 현감으로 좌천된 후, 답답한 소회를 달래기 위해 원앙대라는 빼어난 절경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원앙대는 기장군 동암리 남쪽해변에 있는 암석지대를 말하는데, 당시 그는 기장읍 교리 출신의 신오라는 사람과 사귀면서 늘 이곳에 놀러 왔다고 한다. 요새말로 하면 서울의 중앙관서에서 잘 나가는 고급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촌구석으로 발령받자 공무는 제쳐놓고 친구와 더불어 경치 좋은 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때웠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 또한 무척 낭만적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비오리가 많았다고 하는데, 높직한 암대 위에 서서 멀리 바다를 쳐다보면 비오리들이 대 아래 출렁이는 희푸른 파도를 탈듯 말듯 하다가 일시에 큰 무리를 지어 까마귀 떼처럼 날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비오포(飛烏浦)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이 ‘비오리’라는 오리과의 물새는 자줏빛이 찬란한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암수가 함께 노는 새라고 한다. 결국 비오리는 바다의 원앙새라고 할 수 있으니,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적이 이곳의 큰 바위에다 ‘시랑대’란 글씨와 위의 시조를 각자한 후로, 이곳은 원앙대가 아닌 시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랑’이란 판서에 버금가는 벼슬로서 권적은 그의 예전 벼슬인 이조참의를 판서 직에 버금가는 계급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자신의 노골적인 출세 욕구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어쨌든 권적의 엘리트주의적인 개명이 눈에 거슬리긴 하나, 시랑대는 동해남단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경치를 가진 곳임에 틀림없었다. 파도가 흰 거품을 내며 밀려와서 암대의 칼 같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오색무지개 색깔을 띤 비오리가 춤추듯 날아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환상적이었겠는가. 또한 노송 우거진 절벽과 고요한 바다를 비추는 달빛을 보면 이곳이 과연 인간세상인가 절로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면, 멀리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해동국의 시랑대를 보고 죽으면 원이 없다고 했을까. 권적의 시조 각자 후로, 시랑대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랑대를 운자로 한 시조가 수도 없이 새겨졌다고 하였다. 기장현감 윤학동의 시와 김후 육천민의 시도 각자되어 있었고, 차성가라는 시조도 있었으며, 고종 연간에는 홍문관 교리 손경현이 남긴 시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월천선생(1714∼1786)은 라는 글에서 시랑대의 절경을 구구절절이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시랑대에는 어느 스님과 용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동해 용왕의 딸과 스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설과 빼어난 풍광을 지닌 시랑대는 지난 1960년대만 해도 수많은 한시 가 새겨진 절경의 바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세월의 풍파에 못 이겨 이 절경의 바위들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또한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이 바위들이 발파를 당해, 지금은 그 예전의 풍광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라고 하니 그 서글픈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