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리라 이 봄도 산허리에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이 가곡의 제목과 가사내용을 보면, 마치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살으리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를 연상케 하는 것이 현대판 청산별곡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작곡자가 작사, 즉 시까지 지어서 작곡을 한 특이한 점도 있다. 왜냐하면 작사(시)분야는 시문학의 영역이므로 음악가가 시문학까지 두루 공부하여 깊은 소양을 갖춘 경우는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연준씨는 본래부터 시를 전공했고 작곡은 후에 공부했기 때문에 스스로 시를 지어 작곡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사실 김연준씨는 대학총장을 역임한 육영사업가로 더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격동기 시절을 지나오던 그의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펴보면 여러 분야와 영역에서 다재다능한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914년 함북 명천에서 상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부친이 설립한 유치원에서부터 음악을 시작했고 소학교를 거쳐 함북 경성고보를 다닐 때는 노래와 바이올린에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서양양식의 우리나라 가곡은 그 도입 시기에 있어서 일제 강점기와 같은 시기였기에 당시의 작곡가들은 대체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깔린 민족적 한을 노래했다. 그러나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기에 체념적이며 자학적 허무주의가 깔린 한을 노래하게 됐다. 그 대표적인 노래를 든다면 6.25전쟁 때 부산에 피난하여 합창활동을 하면서 작곡한 윤용하의 ‘보리밭’과 치열한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산화한 무명용사의 넋을 위로한 노래, 바로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비목’이다. ‘비목’은 1970년대 중반, TV드라마 ‘결혼행진곡’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돼 극 내용과 함께 많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면면서 갑자기 유명한 곡이 됐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노래의 선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많은 성악가들이 각종 음악회 때마다 다투어 부르고 음반으로도 취입, 발매돼 더욱 유명해진 노래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에 실리게 되면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때 같이 놀던 고향동무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 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가고파’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추억에 깊이 잠기게 해주는 정겨운 노래다. 이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남쪽 바다는 바로 작사자 이은상의 고향인 마산 앞바다 합포만이다. 이은상은 1903년 일제 강점기에 부유한 한의사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와 집 사이에 있던 노비산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맑은 동심과 시심을 키우게 됐고 후에 그의 호를 ‘노비산’ 앞뒤의 글자를 따서 ‘노산’이라고 지었다. 그는 부친이 설립한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했으며 얼마 후 일본에 유학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나왔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를 거쳐 신문사 등에서 근무했으며 호남신문사사장, 예술원회원, 민족문화협회장 등의 중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전래의 시조형식을 현대적으로 소화한 새로운 시조형식을 개척하여 2천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김
연말연시나 졸업식 때에 널리 불리는 이 노래는 스코틀랜드의 민요로 알려져 있다. 민요는 그 나라 민중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소박한 노래로써 대체로 오래된 노래일수록 작사자나 작곡자는 알려져 있지 않고 구전되어 온 노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기보법이 일반화된 이후에 만들어진 노래로 작사자와 작곡자가 알려져 있다. 이 민요의 가락을 작곡한 사람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영국사람 윌리엄 쉬일드(1748-1829)라는 설이 정설로 돼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잉글랜드의 더햄(Durham)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작곡 공부도 해 두 방면에 뛰어난 음악가가 됐다. 그가 1783년 오페라 로지나(Rosina)를 작곡했는데 이 때 스코틀랜드에서 전해지던 한 민요가락을 정리해서 서곡의 주제가락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 1788년 이 서곡의 주제가락에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즈(1759-1796)의 시 ‘올드 랭 사인’이 붙여짐으로써 스코틀랜드는 물론 영국 전역에 걸쳐 유명한 민요로 불리게 되면서 그는 일약 스코틀랜드의 민족 시인으로 추앙을 받게 된다. 이 노래는 특히 스코틀랜드의 대표적 민속악기인 백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우리 가곡 중에서 제목과 가사만 다를 뿐 똑같은 선율과 반주로 불리어지는 곡이 있다. 정지용작사의 '고향'과 박화목의 '망향', 이은상의 '그리워' 3곡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과 박화목, 이은상이 쓴 시가 어떻게 똑같은 선율의 노래로 불리게 된 걸까? 우선 이 선율을 만든 작곡자 채동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자. 작곡자 채동선은 1901년 전남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나 순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로 유학해 경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918년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음악의 길에 접어들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에 못 이겨 다시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됐다. 베를린 슈테르텐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고 1929년 귀국했다. 이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당시 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들라 하늘나라 아기별도 엄마 품에 잠든다. 둥둥 아기 잠 자거라 예쁜 아기 자장 어느 누구에게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어떤 노래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라는 답변이 제1순위에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듬이나 음정은 잘 맞지 않아도 아기를 안고 조용히, 부드럽게, 그리고 사랑을 담뿍 안고 부르는 엄마의 자장노래야 말로 천사의 노래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시절 엄마 아빠가 불러주는 자장노래를 들으며 자란 기억도 있겠지만, 또 엄마나 아빠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자장가 한 두곡쯤은 알고 노래를 불러 주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곡가가 작곡을 하던 ‘자장가’의 제목은 대게 동일하다. 그래서 작곡자의 이름을 앞에 붙이는 것으로 곡을 구분하기도 한다. 흔히 불리는 자장가로 외국 곡 중에서는 ‘슈베르트의 자장가’,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알려진 ‘풀리스의 자장가’, ‘브람스의 자장가’ 등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민요 ‘자장가’를 비롯해서 ‘이흥렬의 자장가, ’김대현의 자장가‘ 등이 대표적이다. 김대현의 ‘자장가’는 아동 문학가 김영일이 가사를 지었는데 원래 ’예쁜 아기 자장‘이라는 부제가 붙
우리는 슈베르트(1797-1828)를 가리켜 ‘가곡의 왕’이라고 부른다. 그는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무려 1000여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가곡만 603곡으로 절반 이상이나 된다. 작품 수로 보아 당연히 붙여지는 별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기악곡에서도 폭넓게 우수한 곡들을 남겨 가곡만의 왕이 아닌 위대한 작곡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음악가들이 봉건체제의 귀족들이나 사제들에게 예속당해 그들의 취향에 맞춘 형식주의에 의한 순음악 중심으로 창작을 했다. 1800년 프랑스 혁명 이후 예술분야는 그 철학적 기조가 점차 인도주의 성향으로 기울면서 음악 또한 인간 존중, 감정의 충실, 작곡자의 개성적 표현에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샹송이나 멜로디라 부르는 가곡이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한 독일 권역의 음악은 기악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때마침 괴테나 실러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이 나타나 훌륭한 시를 많이 내놓기 시작했다. 슈베르트는 이 시에 멜로디와 피아노반주를 붙임으로써 시(詩)와 음악의 결합인 ‘예술가곡’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음악에 붙임’
요즈음 찬바람이 불면서 길가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종종 걸음을 걷는가하면 가로수 나뭇잎도 낙엽이 되어 흩날린다. 이에 쓸쓸한 정감이 절로 스미면서 자연스레 생각나는 노래가 있으니 바로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 시는 박목월(1916-1978) 시인의 작품으로,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서 이 시에 얽힌 대략적인 사연을 밝히고 있다. 첫 번째 만남은 오월 어느 날 오후, 대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녀는 연한 하늘빛 갑사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그 다음의 재회는 화약 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한 모퉁이 에서였는데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세 번째 만남은 어느 봄날이었는데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저편에서 흰옷을 입고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걸어오는 그녀를 보게 된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중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달라고 청한다. 병실에서 만난 그녀는 연두 빛 치마에 반회장저고리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는 축배를 든다. 꽃병에는 개나리꽃이 꽂혀
사랑이여 우리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서로서로 근심 걱정 나누며 살아 왔네. 근심걱정 나눌진대 그 무엇이 두려워 그대는 나의 생명, 나의 온갖 즐거움. 요즈음 작곡가 ‘베토벤’의 이름이 붙은 제목의 TV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음악가들의 색다른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이래저래 베토벤의 이름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베토벤은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 독일에서 활약하던 고전파 음악가로 봉건체제 속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의 신동 모차르트처럼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기 때문에 부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2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당대의 대음악가이자 선배인 하이든에게 인정을 받아 귀족들의 후원을 얻게 됐고,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그는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면서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예속된 가운데 활동했으나 베토벤은 후원은 받아도 결코 예속되지 않았고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했다. 타협을 모르는 강한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성격도 작용했겠지만 남다른 철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생
박연폭포 흘러내리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 에에에 에루아 좋구 좋다. 어어어 럼마 디어라 내 사랑아. 박연폭포하면 예로부터 명유 서경덕과 명기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절경에 속한다. 황진이가 그 절경에 크게 감탄하며 시를 지었다는 폭포의 물줄기는 황진이의 아름다운 자태와 풍류마저 떠올리게 한다. 이 민요의 '간데 마다 정들여 놓고 이별이 잦아서 못 살겠네'라는 2절 가사에서는 한 사람에게 정착할 수 없는 기녀의 삶에 대한 황진이의 마음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민요는 타지방 민요에 비해 대체로 시김새(서양의 꾸밈음과 같은 형태의 잔가락)가 많지 않아 선율이 깨끗하고 경쾌하며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타지방 민요에 비해 세련된 선율이라는 점이나 내용이 당시의 기예를 공부한 기녀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경기민요는 주로 기녀들이 만들어 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한 때 민요를 부르는 일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의 필요성과 새로운 문화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통음악과 예술을 필히 계승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길 임이 오시는가 / 갈 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췰까 / 흐르는 물소리 임의 노래인가 1970년대 초, 동양의 색채와 민족적 정서가 담겨있는 그림 같은 서정시 '임이 오시는지'는 예술가곡으로 만들어져 방송으로, 음반으로 성악가의 노래를 통해 이 곡의 제목처럼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시에는 국민개창운동과 함께 전국적으로 합창단들이 많이 조직되어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선명회합창단, 리틀엔젤스합창단 등의 어린이 합창단들이 전 세계를 돌며 국위를 선양했다. '임이 오시는지'는 작곡자가 가곡을 합창곡으로 편곡, 발표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합창대회가 열릴 때마다 누구나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이 되기도 했다. 결국 80년대 중반에는 음악교과서를 개편하면서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실려 오늘에 이르게 됐다. 작곡자 김규환이 이 곡을 작곡하게 된 때는 정확하게 1966년 5월 13일이다. 작곡자 본인은 당시 KBS합창단 상임 지휘자로 재직할 때였고 KBS 방송사 건물은 남산에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사무실 휴지통에서 구겨진 악보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작곡가의 눈에는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오선지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