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가 ㅅ 선생을 만난 것은 K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이었다. 나는 28세 신참 교사였고, ㅅ 선생은 나보다 서너 살 더 위의 훈훈한 선배 교사였다. ㅅ 선생은 학생들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굳이 선생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과학 선생인 그는 귀찮은 실험들을 재미있는 실험으로 끌어가려고 허다한 준비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공을 차고, 이런저런 야영 프로그램에 기꺼이 학생들과 어울렸다. 그는 ‘소명’을 말하지 않았지만, 특유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그저 어디에도 강박 되지 않고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즐겼다. 그의 열정은 상당히 쿨(cool)한 것이어서 열기보다는 그야말로 신선하고 서늘한 것에 가까웠다. 그해 가을 ㅅ 선생은 경주로 2학년 수학여행을 인솔해 갔다. K 고등학교는 그전 해에 지역 폭력조직에 학생들이 연루되어 홍역을 치렀던 처지이라, 교장선생님은 학생 지도에 각별한 관심과 정성을 쏟으라고 당부했다. 여행 인솔의 대표 책임을 맡은 교감선생님은 여행 중에 교칙을 어기는 학생은 처벌을 면할 수 없음을 여러 번 공지하였다. 경주에서의 첫날 저녁, ㅅ선생은 자기 반 몇몇 장난꾸러기들이 숨겨 둔 술 몇 병
1. 길 가는 사람을 무작위로 택하여 물어 보라. “당신은 권력자이십니까?” 대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천만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권력 근처에도 못 가봤습니다.” 나 역시도 이런 질문을 불쑥 받는다면, 말도 안 된다며, 묻는 사람에게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권력은 영어로는 ‘power’이다. 이 말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power’의 뜻을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소 소박하게 들리는 ‘힘’이라는 풀이가 먼저 나온다. 팔 힘도 힘이고, 열도 힘이다. 물리적으로는 에너지가 힘이다. 애교도 힘이고, 성적도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식도 힘이다. 한류(韓流)가 세계로 퍼지는 데에는 그 안에 분명 어떤 힘이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한류를 포함한 문화도 힘이다. 우리는 권력, 즉 ‘힘’을 너무 정치적으로만 생각한다. 또 우리는 권력, 즉 ‘힘’을 너무 경제적 파워로만 환산하여 생각한다. 우리는 ‘권력’이라고 하면, 거대한 정치권력이나 어마어마한 재벌권력만을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거의 통념이 되어 버렸다. 어릴 적에 커서 무엇이 되겠느냐 하고 물어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재벌 등이 되겠다고 하면, 큰
1. 이태리 밀라노 여행에서 손 편지로 쓴 엽서 한 장을 국내의 친구에게 보내려고 밀라노 중앙역 근처의 우체국에 들어 간 적이 있었다. 창구에 그저 대여섯 사람 정도가 줄을 서 있어서 나도 그 뒤에 가서 섰다. 나는 내 동료 일행을 역 광장에 두고 잠깐 우체국 좀 다녀오겠노라고 하고 우체국에 들어 왔기에 빨리 일을 마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편물 접수 처리를 하는 직원의 일 속도가 너무 느렸다. 손님의 시시콜콜한 질문과 주문에 모두 한도 끝도 없는 대답을 해 준다. 또 준비나 절차에 문제가 있는 손님에게는 그 준비를 대행해 주듯이 시간을 쓴다. 갈 길이 먼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한국에서라면 아마도 뒤에서 벌써 항의성 고함이 터졌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동부 역에서 독일 슈투트가르트 행 열차의 표를 발권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긴 행렬 뒤의 다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느릿느릿 일을 처리하는 역무원의 한가로운 표정! 우리 일행은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자칫하면 계획한 열차를 놓칠 수 있다. 그러면 그 이후 일정은 낭패이다. 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빠른 업무 처리 속도에 자부심을 재
1. 기사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장면이 익숙하게 여겨지는가, 아니면 낯설게 여겨지는가. 기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군대에 갔던 어느 사병이 휴가를 나와서 보니 공사판에 다니던 아버지는 다쳐서 쓰러져 있고, 여덟이나 되는 식구들은 굶고 있다. 휴가병 아들은 식구를 돌본다고 정신없이 막벌이를 하였다. 휴가가 끝나도 차마 군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탈영병이 되었다. 군인이 탈영하는 죄는 크다. 탈영은 군대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므로 엄한 군율로 다스리게 되어 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자수시키고 당국에 눈물로 잘못을 빌었다. 1971년 4월 3일 자 경향신문에 난 기사이다. 신문은 기사의 제목을 ‘모정(母情) 앞에서 군율(軍律)도 주춤’으로 붙였다. 어머니의 딜레마가 참으로 소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가라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받들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아픈 모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요즘 어머니들은 어떠할까. 탈영이란 죄가 워낙 엄중하고, 자식의 과중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니, 자수를 권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엄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국에 눈물로 잘못을 비는 엄마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만큼 세태가 달라졌다고나 할까. 사람들이
01 속기(俗氣)가 넘치는 유치한 여행을 말해 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명품 쇼핑에 눈먼 여행이 우선 떠오른다. 돈 자랑의 욕망이 허영의 깃발을 드높이는 여행이다. 유흥 중심으로 가는 여행도 천박하기로는 금메달감이다. 진정한 견문은 안중에도 없고 쾌락의 욕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여행이 존재하는 격이다. 이런 여행을 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종의 욕구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다. 또 이런 여행을 조장하는 사회 문화적 풍토가 있다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의 여행 취향에도 속된 기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행 과시욕이다. 남 안 가 본 곳을 나만 가보았다는 식의 자랑이 흔하다. 나 이번에 어디어디 다녀왔고, 작년 해외여행에서는 또 어디어디 많이 가 보았고, 내년에는 또 어디어디 수많은 곳을 가 볼 것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여행의 내공이 전혀 쌓이지 않은 사람들이 범하는 유치함이다. 이런 욕구가 지나치면 여행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그것도 한꺼번에 여러 행선지를 되도록 많이 끼워 넣고서는 ‘견문의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비행기 타고 나라 밖 나가는 일이 국
첫째 귀에서 소리가 나는 이명(耳鳴) 증세가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뜰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에서 앵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그 소리에 신기하여 혼자서 신이 났다. 그래서 동무에게 가만히 이렇게 속삭였다. “얘, 너 이 소리 좀 들어 봐. 내 귀에서 앵 소리가 난다. 피리 부는 소리, 생황 부는 소리가 다 들린다.” 그 동무가 귀를 가져다 맞대고, 아무리 들어보아도 아무것도 들리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명이 있는 아이가 딱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남이 자기 귀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시골 사람과 같이 잠을 자는데, 그 시골 사람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았다. 마치 숨이 막히는 듯, 휘파람을 부는 듯, 탄식을 하는 듯, 한숨을 쉬는 듯, 불을 부는 듯, 물이 끓는 듯, 빈 수레가 덜컥거리는 듯한데, 들이쉴 때는 톱을 켜는 듯하다가, 내쉴 때는 돼지가 씨근거리는 듯했다. 같이 자던 사람이 흔들어 깨우자, 그는 불끈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내가 언제 코를 골았단 말이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문집 연암집(燕巖集) 가운데 ‘공작관문고 자서(孔雀館文稿自序)’
1. 지난 봄 대학 신입생들을 위한 특강을 하였다. 세 가지를 당부하였다. 첫째는 너무 일찍 이성 친구를 사귀어서, 캠퍼스 안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애인 관계, 이른바 CC(Campus Couple)로 확정되는 것은 가급적 유보해라.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이 너무 많다. 둘째, 전문가가 되려면 자기의 관심 주제를 정하여 지속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블로그(Blog)를 운영하라. 너의 주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과 지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셋째 학교에 다니는 동안이나 사회에 나가서나 은사로 모실만한 교수님과 생애를 두고 교유하여 친화될 수 있도록 하여라. 설령 네가 어떤 과오를 범하여 감옥에 가더라도 기꺼이 면회를 와 주실 수 있을 정도의 스승님이면 좋겠구나. 너의 일생을 복되고 덕스럽게 한다. 스승과 만나는 생애 내내 정신의 발달과 성숙을 거느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스스로 내 말을 내게 적용해 본다. 나는 첫째 항목은 잘 지켰다. 둘째 항목은 블로그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글을 쓰려는 의지는 제법 가졌던 셈이다. 세 번째 항목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는 스승 복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내 아버지께서
1.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에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 1899~1974)가 있다. 그는 <걸리버 여행기>, <돈키호테> 등의 고전 명작을 현대 시각으로 다시 집필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전 소설가로서, 안데르센 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작가다. 그가 전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해 겨울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들 몇몇끼리 여행을 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에른스트’ 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행 일정이 빽빽하고 먼 길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피곤했습니다. 그 날 우리는 밤 열차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밤늦게 찻간에서 피곤해 쿠션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에른스트는 내 앞좌석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조용히 에른스 트의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잠이 든 에른스트는 점차 깊이 수면에 빠져드는 듯했습니다. 그가 잠들고 한참 지났을 때였습니다. 에른스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조끼 주머니를 뒤졌습니 다. 그리고 약통을 꺼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일 날 뻔했어. 하마터면 수면제를 먹지 않고 잘 뻔했군!” 그는 부지런히 약을 먹고 다시 잠드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좀 코믹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1. ‘먹을수록 많아지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 놓인 음식은 먹을수록 줄어드는 법인데,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해 보라는 수수께끼다. 정답은 ‘나이’다. ‘나이’는 먹을수록 많아진다. ‘나이 먹다’라는 말의 의미와 용법을 재치 넘치게 살려서 만든 수수께끼다. 또 한 살 나이를 먹어야 하는 새해인 시점에서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렇다면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인가. 이 역시 ‘나이’가 답이다. 그러나 답은 ‘나이’뿐이 아니다. 욕도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진 않는다. 그러므로 ‘욕’도 정답이 된다. 스포츠 경기에서 점수를 잃는 것도 ‘먹는 것’에 들어간다. 예컨대 “우리 팀이 벌써 두 골이나 먹었다”라고 했을 때의 ‘먹다’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 경우는 배가 부르기는커녕 배가 아파지는 편에 가까운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먹기도 한다. ‘마음을 먹는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묘미가 있다. 밥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마음’을 먹다니? 아니 도대체 ‘마음’이란 것이 눈에 보이기나 해야 말이지. 욕을 먹는 것이나 골을 먹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눈으로 보이는
1 면접시험 같은 데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하고 물으면 “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이 드물기는 하지만 있다. 면접시험에서 성적을 잘 얻기 위해서 일시적 전술로 하는 답이라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중에는 정말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학생도 있다. 나는 그런 학생의 아버지가 한없이 부러워진다. 도무지 그렇게 될 자신이 나는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다 키웠지만 나의 아버지 노릇은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 사실은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나마 이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50대 중반에 어떤 단체에서 하는 ‘아버지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해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서였다. 자녀들은 아버지인 나의 인간적 약점과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것도 ‘아버지 학교 프로그램’ 참여 뒤에 우리 집도 가족대화라는 것을 조금은 자유롭게 하면서부터였다. 나는 아버지 노릇을 제법 잘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낙제를 면하기 어려운 수준인 것이다.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결과들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나는 이 점이 가장 후회스러웠다. 아버지를 처음부터 다시 해 볼 수는 없을까.
1. 오늘날 만연된 욕설언어현상은 괴물과도 같다. 특히 청소년의 욕설 행태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 괴물을 대할 때의 당혹감을 가지게 된다. 괴물은 정체가 모호하다. 오늘날의 욕설과 막말은 그 정체(正體)가 쉽사리 구명되지 않는다는 점, 무섭게 번져나가서 그 위세가 걱정스럽고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괴물을 연상하게 된다. 이런 욕설현상을 어떻게 한 칼에 처치해 버릴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점, 궁극에는 선량한 사람들 다수가 속절없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괴물과 흡사하다. 더구나 이 괴물을 은근히 즐기고 편드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처럼, 욕설과 막말을 즐기고 편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 오늘날의 욕설·막말 현상이 참으로 괴물의 속성을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된다. 더 그럴싸한 비유로 말하면 ‘욕설과 막말의 만연’은 ‘좀비(zombie)의 준동’처럼 느껴진다. 좀비는 부활한 시체를 일컫는 말이다. 좀비는 호러와 판타지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좀비는 ‘인간을 적대시하는 몬스터’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완전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고, 타인에게 조종되거나 생전의 생물적인 본능과 반사행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많다(위키 백과사전)
나는 임꺽정이나 장길산 같은 문학 작품을 학생들에게 읽도록 권장하고 싶다. 욕설언어에 대한 총체적 인식력을 기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습득한 욕설이나 막말은 내 안에서 제압되고 극복된다. 그뿐이랴. 일종의 지적 만족감까지 수반하게 한다. 이런 아이들은 욕설과 막말을 상당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사용은 하지 않는다. 욕설지도를 하려는 선생님이라면 필수적으로 이 작품을 독파할 것을 권한다. 욕설 지도와 관련해서 아주 신통방통한 자신감이랄까 은근한 내공이 생긴다. 1. 좀 엉뚱한 질문을 해 보자. 평판과 가치가 널리 알려진 한국 소설 중에 막말과 욕설이 푸짐하게 나오는 작품을 들라고 한다면 어떤 작품이 떠오르는가. 더구나 그것이 한국문학사에 한 봉우리를 이루는 작품이라면 무엇을 들겠는가. 나는 그 분야에서 홍명희의 임꺽정과 황석영의 장길산 만한 작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낡은 파본의 임꺽정을 제대로 본 것은 1960년대 중반 고등학교 때 학교도서관에서였다. 장길산은 20대 초반 군대를 막 제대하고 중학교 교사를 하던 때 봤다. 나는 이 작품들 속에 나오는 무지막지한 욕의 언어들에 거의 압살되는 느낌이었다. 임꺽정을 읽을 때는 어리기도
1. ‘막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점잖게 설명이 되어 있다. ‘함부로 지껄이는 말’로 되어 있기도 하고 ‘속되게 마구잡이로 하는 말’로 풀이되어 있기도 하다. 그 풀이가 너무 차분하고 온건하여 이런 말이 무슨 막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걸 막말이라 한다면 천지에 막말은 지천(至賤)으로 깔려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기야 막말은 그 천박함이 지극한 경지에 달한 것이니 ‘지천(至賤)’이란 말과 절묘하게 호응한다. 사전 풀이대로 하니 막말이란 것이 특별히 잘못된 말이 아닌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더구나 이게 뭐 매우 나쁜 말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막말에 대한 나의 경험이 사전의 풀이를 정정하고 싶어 한다. 막말이라 하면 사전에서 풀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악독한 말로 풀이해야 할 것 같다. 예컨대 ‘막가파 식으로 상대를 없애버리겠다는 듯이 하는 말’이라거나 ‘막다른 지경에서 죽기 살기로 상대를 해치는 말’ 정도로 풀이해야 ‘막말’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것 아닐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왜 사전의 낱말 풀이가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말이 변한 것일까.
1. 어떤 언어문화 연구결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남이 나를 칭찬해 줄 때 이 칭찬에 대해서 반응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주로 ‘무응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무응답은 말로써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표정까지 무표정은 아닐 것이다. 고마운 표정, 쑥스러운 표정, 겸손의 표정 등이 따라 붙을 것이다. 칭찬에 대해서 말 없음으로 반응하는 한국인들의 태도에는 대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려는 것이 묻어 있다.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 속에 그런 것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한국인들은 남의 칭찬에도 조심스럽게 반응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칭찬, 즉 자기 자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좋지 않게 생각한다. 한국 속담에 ‘자식 자랑하는 사람은 팔푼이,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은 칠푼이’라고들 했다. 팔푼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사람이 100%의 인간이라면 80%밖에 안 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자기 가족 자랑 하고 다니는 사람은 자그마치 20% 내지는 30% 모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잘난 척 나서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태는 바뀌었다. 내 잘난 것을 내가 안 알리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이런 인식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겸손의 미덕’ 가지
1. 결혼식을 마친 젊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만 섞인 요구를 한다. 요구의 내용은 이러하다. 결혼식 축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다. 젊은 아들은 논리적으로 말한다. 축의금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들어온 돈이라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원인 행위가 없었으면 축의금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말한다. 오늘 축의금을 내어 준 많은 분들은 아버지의 친구나 지인들이다. 적어도 아들 친구보다는 훨씬 더 많았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도 내 친구들 자녀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할 친구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들어온 축의금은 사실 이미 내가 친구에게 축의금으로 내었던 돈의 갚음이고, 또 자녀 혼사를 앞둔 친구들에게는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다. 그러니 이 축의금은 내가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하는 것이리라. 아버지는 덧붙여 말한다.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지출한 경비를 소상히 설명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신혼을 꾸리고 살 집을 구하기 위해서 얼마를 지출했고, 그 과정에서 은행 돈을 얼마를 빌렸고 오늘 예식장 경비만 해도 상당하다. 축의금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