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벌린과 달라디에, 1938년 뮌헨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 히틀러의 슈테덴 병합 야욕을 꺾다.” 물론 뮌헨회담은 정반대의 드라마로 끝났고, 연합국의 자유 수호 의지를 과소평가한 히틀러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다.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계획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에 성공한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은 동년 5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계획했고, 우선 독일계 3백만 명이 거주하던 슈테덴을 병합하려 했다. 당시의 체코는 동맹국 프랑스의 군사원조에 의지했다. 역시 동맹관계에 있던 소련도 체코의 방위를 위해 필요할 경우 영·불과 협력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 무렵 소련은 거의 무시되었다. 히틀러는 줄곧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요구했다. 그렇듯 독일의 체코침공이 임박한 듯했으나 영국도 프랑스도 체코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양국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 9월 22일 체임벌린은 독일 고데스부르크에서 히틀러를 만났지만 그의 강경한 요구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히틀러는 체코인들에게 9월 28일까지 슈테덴에서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주장을 수용하려 했지만 체코는 물론 영국 내각과 프랑스는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요구를 일축하고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포기하지 않다.” 소련이 미국의 코앞이나 다름없는 쿠바에 핵탄두 발사가 가능한 미사일기지 건설을 강행했을 경우 인류세계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할 만큼 스쳐 지나가 버림직한 일들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대사건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물론 그 역으로 세상이 숨을 죽이고 귀추를 주목하며 긴장하는 대결이나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사례를 간간이 기록하고 있지만 ‘쿠바사태’야말로 세계를 극도로 긴장시킨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철의 장막’ 안쪽의 공산주의 진영과 서방의 자유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을 벌여온 세계는 하마터면 냉전이 아닌 열전으로, 그것도 인류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핵전쟁으로 빠져들 뻔 했다. 바로 쿠바미사일위기였다. 1960년대 서양의 내로라하는 군사평론가들은 동․서 양진영이 보유한 핵무기가 지구의 생명체 모두를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깡그리 몰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주지하듯이 2차 대전 후의 그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명실공히 자유민주세계를 이끄는 국가였다. 터키와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은 1947년의 트루먼선언, 총
“발트함대, 1905년 대한-쓰시마해협에서 일본 함대를 완패시키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발트함대는 일본해군에 완패했고, 더불어 러․일전쟁도 끝났다. 그리고 대한제국도 곧 숨을 거두었다. 1905년 5월 27~29일의 진해부근 해전에서 발트함대는 전함의 3분의 2가 침몰하고 6척이 나포되는 등 문자 그대로 참패했다. 겨우 4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해 침몰을 면했다. 세계 최강으로 소문난 발트함대였지만 7개월의 지루한 항해로 함선도 수병도 지칠 데로 지친 상태에서 기동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데다 하늘을 찌를 듯한 상하 병사들의 사기를 자랑한 일본 함대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청일전쟁(1894~95)에서의 승리로 조선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된 위에 랴오뚱반도와 타이완 등을 얻어 욱일승천의 기세에 들떠있던 일본은 뜻하지 않게 삼국간섭에 부딪쳤다. 독일․러시아․프랑스의 위세에 눌린 일본이 결국 1895년에 랴오뚱을 청에 반환했지만 이후 한반도는 청․일 대신에 러․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삼국간섭을 주도해 해 일본의 랴오뚱 반환을 이끌어낸 러시아는 청과 비밀협약을 맺고 시베리아철도의 남만주 통과권을 얻었
“청나라 군대는 자국의 항구들을 공격하고 양쯔강에 진입한 후 전장(鎭江)을 점령해 남북을 차단한 다음 난징으로 육박하던 영국군을 결국 격퇴시켜 중국이 종이호랑이가 아님을 과시했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이다. 청은 잘 훈련되고 근대적 병기로 무장한 영국군에 무릎을 꿇었고,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빗장이 풀린 중국으로 물밀듯이 들어가 각종 이권을 탈취해갔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이 아편(앵속, 양귀비)의 수입․판매․흡연을 금지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청은 1839년 6월에 임칙서(林則徐)를 특명전권대신으로 꽝조우(광주)에 파견해 영국 상인의 아편 2만 상자를 몰수해 불태우고 영국과의 통상을 단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과의 무역확대를 꾀하던 영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고, 영국은 결국 다음해 6월 청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19세기 전후의 중국은 아편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물론 국민건강상으로도 심각한 폐해를 입고 있었다. 기원전 34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재배된 것으로 전해지는 아편은 서아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유럽과 인도로 전래되었으며 중국에는 아랍상인들에 의해 서기 400년에 전해졌다고
“표트르대제. 감기를 이기고 20여 년 더 통치해 러시아의 근대화를 크게 진척시켰다.”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다. 표트르 1세는 한창 일할 나이인 52세에 타계했고, 따라서 그가 열성적으로 추진하던 러시아의 서구화도 늦어지게 되었다. 표트르대제가 50대 초반에 타계하지 않았을 경우 러시아의 역사는 과연 달라졌을까? 그것과 관계없이 볼셰비키혁명은 일어났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도 감행되었을까? 흔히 북극곰으로 불리는 러시아. 냉전시대의 소련만 못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강대국으로 행세하는 러시아. 9세기 중엽 이래 바이킹의 지배아래 있었고 -그들은 모스크바지역에 노보고로드왕국을 건설했다- 13세기 이후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아오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겨우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했지만 후진의 굴레를 벗지 못한 러시아. 그 러시아의 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긴 표트르 1세(1682-1725) 이야기다. 후진국 굴레 벗지 못한 러시아 16세기에 접어들어 이반 4세가 짜르(tsar)를 칭하고, 17세기 초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로마노프왕조를 연 후에도 러시아는 후진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표트르대제에 의해 서구적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2m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은 없었고, 따라서 프랑스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목걸이사건도 있었고 혁명도 일어났다.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래에서 보듯이 혁명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따라서 목걸이사건 아니라도 프랑스혁명은 일어났을 것이다. 사가들이 산업혁명과 함께 ‘이중적 혁명’으로 부르는 프랑스혁명. 19세기의 프랑스 사가 줄미쉴레는 프랑스혁명을 평등의 재생이자 영원한 정의의 출현으로, 미국의 저명한 현대사가 C.브린턴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가지게 하는 근대사의 드문 사건’으로 평가했다. 좀 지루하지만 혁명의 전말부터 개괄해보자. 혁명의 불씨 제공한 겁 없는 왕비 1789년 5월에 170여 년간 개점휴업 중이던 ‘삼부회’가 소집되면서 혁명의 막이 올랐다. 1788, 1789년의 흉작으로 곡가가 앙등(昻騰)하고 실업자가 급증해 정치·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열린 삼부회는 투표방식을 놓고 대립했다. 평민대표는 1, 2신분의 승리를 보장하는 신분별 투표 대신에 1인 1표 방식을 주장했다. 삼부회가 3신분 610명, 1신분 291명, 2신분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 휘하의 몽골군, 1240년대 초에 빈과 프라하를 지나 계속해서 서진하다.” 몽골족이 중원을 더 오래 지배하고 중앙과 서남아시아 그리고 동유럽 일대를 보다 확고하게 장악했을 경우, 또 헝가리평원을 지나 오스트리아·독일 등 중부 유럽까지 진격했을 경우 세계사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 유럽은 중앙아시아로부터 내습한 훈족(흉노족으로 보기도 하나 확실치 않다)에 의해 이미 4세기 중엽 이후 살육과 약탈이라는 일대 참극을 한 차례 경험했다. 그로 인해 흑해연안의 동·서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의 로마제국 영역으로의 침략 내지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결국 노쇠한 로마제국이 멸망한 사실을 역사는 비교적 소상히 전하고 있다. 동유럽을 향한 징기스칸의 대약진 징기스칸의 몽골족은 중원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중앙·서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동유럽으로 진출한 그들은 모스크바 지역을 경유해 헝가리 평원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유럽의 십자군과 이슬람세계가 각축을 벌이던 1250~1260년대에는 시리아와 레바논까지 진출해 십자군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다. 여기서는 바투군의 동유럽정복을 중심으로 몽골족 대약진의 일단
“정조와 순조, 천주교를 금압하지 않고 믿고 전도할 수 있게 하다.” 사실은 전혀 달랐다. 천주교는 금지를 넘어 수차례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정조 때의 일이었지만 그때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을 동반한 천주교를 수용했더라면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보다 오히려 앞서지 않았을까. 천주교 전래의 역사적 의의를 개항문제와 관련시켜 살펴보고, 마찬가지로 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조선 후기에 놓쳐버린 근대화의 기회를 더불어 되짚어보고자 한다. 신앙으로 수용되면서 박해받아 우리나라는 보다 일찍이, 적어도 일본에 앞서 근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두 차례의 양요는 물론 그에 앞선 천주교의 전래가 그 기회였다. 만약 천주교가 그처럼 철저하게 금지 받지 않았으면, 적어도 박해만이라도 그처럼 가혹하지 않았으면 서양의 사상은 물론 과학과 기술을 비교적 활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극심한 박해 탓에 천주교도들이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상황이 아니었을 경우 천주교는 1백여 년 후에 개신교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교육 등에서 이념적, 현실적으로 담당했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천주교는 명나라에 들어와 기독
“이슬람제국의 아랍인들, ‘0’의 사용은커녕 그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명수준은 매우 낮을 것이다.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을 넘어 화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는가 하면 동영상 이동전화기를 비롯한 최첨단의 이기를 사용하는 등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일 혹은 모레엔 또 어떤 신기한 기계가 발명되어 우리를 놀라게 할까?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다못해 인간성의 상실을 염려하게 하는 과학기술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토대 이끈 ‘0’ 인류가 발견·발명한 각종의 원리나 기호들 중에서 인류로 하여금 한계를 알 수 없는 과학과 기술에 도전할 수 있게 한 것 중의 하나는 숫자 ‘0’일 것이다. 매우 단순하게 접근해도 0의 개념이 없으면 ‘-’, 즉 음수(陰數)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미분이나 적분 같은 고등수학은 생각할 수 없다. 인공위성, 컴퓨터, 휴대전화기, 나노 등은 모두 고등수학의 소산물이다. 화약, 나침반, 종이가 동양에서 발명되었지만 고등수학을 가능하게 한 0 또한 동양인의 고안물이었다. 사실 누가 최초로 0을 고안해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사가들은 견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군대를 격파하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악티움해전에서는 물론 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참패했다. 그리하여 승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고 더불어 공화국 로마는 ‘제국 로마’로 변신했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우연론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사는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줄곧 시비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하자면 여성미의 척도인 코 높이가 알맞지 않아 클레오파트라가 그처럼 절세미인이 아니었을 경우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악티움해전은 없었을 것이고, 더불어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로마제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논리다. 근대의 사가와 역사철학자들 대부분은 “러·일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역사 필연론과 함께 우연론을 배격하지만,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코 가설 같은 우연론의 매력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갈리아(현 프랑스 지역)의 정복자로 입신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라반[隊商]의 낙타몰이 무함마드, 하디자를 만나지 못하다.” 사실은 무함마드가 하디자를 만나 결혼한다. 이슬람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알라의 섭리로 설명하지만 무함마드가 카라반의 주인 하디자와 결혼하지 못했어도 이슬람교가 개창되었을까?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까지, 예멘에서 체첸에 이르기까지 60여 국가의 13억 5천여 신도(이슬람 측은 17억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약 67억 세계인구의 1/5 내지 1/4에 달한다. 27개국으로 늘어난 EU 전체의 인구가 5억에 훨씬 못 미친다지만 이슬람교의 교세를 웅변해주는 수치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수와 달리 탄생과 관련해서도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특히 40세 이전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사후에 기록된 것이어서 자세하지 않고 신빙성도 그리 크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무함마드는 570년경에 메카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6세에 부모를 잃어 조부의 보살핌을 받던 중 8세에 조부도 타계해 백부의 보호아래 자랐다. 15년 수행 끝에 알라의 계시 받아 성장한 후에는 부유하지만 두 차례 결혼해 수명의 자녀를 둔 미망인 하디자 소유의 대상(隊商)에서 낙타몰이로 일했다. 낭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