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도 안 계신다. 마루에도 안 계신다. 서둘러 사랑방 문을 여니 한겨울 오후의 옅은 햇살이 냉기 가득한 빈방을 지키고 있다. 가슴이 미어지더니 뜨거운 눈물이 펑펑 솟는다. 돌아가신지 25년이 지났건만 고향집에만 오면 아이처럼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내가 흉볼까봐 서둘러 눈물을 닦고 새로 지은 안채로 건너간다. 현관을 들어서니 형님 두 분과 형수님 두 분 그리고 제수씨가 이미 제사 음식을 장만하시느라 분주하다. 형제를 만나는 반가움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밀어낸다. 나는 세상의 모든 직함을 버리고 그저 계산댁 셋째 아들이 된다. 작은 방으로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다. 깨끗이 씻은 문어, 돔베기, 쇠고기 그리고 고등어 등이 소반에 담겨있고, 널찍한 도마에 놓인 큰 칼은 새파랗게 날이 서 있다.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조심스럽게 도마 앞에 앉아 어육을 장만하기 시작한다. 어육을 장만하는 특별한 일은 의례히 두 분 형님께서 맡아하셨다. 어육을 다루는 절제된 손길과 경건한 표정을 바라보면서 형님들의 아버지에 대한 흠모의 지순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모의 숭고가 열락으로 승화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몇 해 전에 어육 장만하는 일을 물러 받고
2008-12-09 09:42눈에 띄는 수작이 없는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6편의 작품을, 이야기의 새로움과 작가로서의 가능성 등에 주안점을 두고 다시 읽어 보았다. 여기에서 ‘내 이름은 캐빈’, ‘로봇과 나’, ‘멋진 누군가’ 3편이 최종심에 오르게 되었다. ‘내 이름은 캐빈’은 영어가 상용화된 미래의 이야기로 문장이 안정되어 있고 이야기도 거침이 없었지만 미래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사회 현실의 묘사가 어색하여 이야기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미래라는, 사회적 배경에 대한 준비가 치밀했더라면 더 빛났을 작품이다. ‘로봇과 나’는 형과의 갈등과 화해를 무난히 그려냈고 과학과 종교의 만남도 상투적이지만 무난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잘 읽히는 대신 새로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도 작의적이었다. ‘멋진 누군가’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진지하고 이야기도 참신해서 쉽게 앞의 두 작품을 밀어냈다. 그림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흔치 않은 작품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장도 안정되어 있어서 투고작 중 가장 돋보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작품은 잘 읽히지 않는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동화의 1차 독자는 어린이이고 읽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
2008-12-09 09:40‘무언가를 쓰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마주칠 때마다 제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쓰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문창과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는 ‘나도 다른 이의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기분으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오만한 마음 탓으로 언제나, 어떤 쓰기에서도 그 욕심을 한껏 채워내지 못하였습니다. 제 그릇의 모자람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덜 차면 덜 찬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글에는 만족함이란 것이 없다지만, 게다가 제 글이 만족할만한 것일 리가 없지만, 글의 완성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나 제 자신이 글을 쓰는 지금이, 그 순간들이 참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바보같이도 잘 쓰지도 못하는 게 쓰는 것만은 참 좋은가 봅니다. 동화를 쓰는 내내 아이의 마음을 담고 싶었고, 아이의 마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과장되거나 얕보지 않고 천진하고 진지한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글을 쓰도록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살겠습니다. 부족하고 또 모자란 제 글을 추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한국교육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마음만…
2008-12-09 09:38일요일 오후예요. 바람이 들판의 풀꽃들을 잔잔히 흔들고 있어요. 햇살은 강물을 탱글탱글 윤나게 부풀려주고 강가에는 부들이 한껏 자라 올랐지요. 도요새 가족이 먹이를 찾아 거니는 들판에 우리 가족은 자리를 펴고 앉았어요. 우리 가족은 다섯이예요. 엄마, 아빠, 오빠, 언니 그리고 나. 여기는 그림책 속, 24쪽의 그림틀 안이에요. 그래요. 우리 식구는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랍니다. 사실 나는 책의 내용도, 제목도 잘 몰라요. 이웃의 글씨 가족이 앞 쪽에 바글바글 살고 있지만, 그 이웃은 아주 무뚝뚝해요. 나는 글씨를 잘 모르는 어린아이고요. 항상 책을 보는 사람들이 어린 친구들인 것을 보니, 아마 이 책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책인가 봐요. 친구들은 나들이 나온 우리 가족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놀러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하곤 하지요. 그렇지만 말예요. 항상 매일같이 이렇게 놀기만 하는 저는 사실, 공부도 해 보고 싶고, 집 안에서 쉬고 싶을 때도 있어요. 책이 덮여지면 우리 가족은 23쪽 이웃과 마주치게 된답니다. 어느 날이었어요. 평소 말없던 이웃가족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옆 쪽 가족은 오늘도 여행만 하고 있다
2008-12-09 09:33행복도 가지가지다. 내게 행복은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특히 동시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만큼은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어 좋다. 살아가는 일에 어깨가 늘어질 때에도 자판기를 두드릴 때면 저절로 신이 났다. 사람들은 동시가 글의 장르 중에서 가장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동시야말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어린이들이 눈높이와 어린이 마음을 잘 알아야 동시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야말로 어린이들을 이해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휴머니즘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동시를 쓸 수는 있지만 그 글들이 모두 동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고 동시를 시작하라던 어느 선배의 말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어린이들과 생활한지도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곧 끝종이 울리면 교단을 내려가야 한다. 돌아보니 참으로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다. 기뻤던 일 속상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어린이들에게 동시를 읽히고 가르치고 내가 동시를 쓰면서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쭙잖은 내 동시를 뽑아주신 한국교육신문사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등단이나 수상
2008-12-09 09:26철구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판다. 더럽다 철구야 소리치자 씩~ 웃더니 눈 깜짝할 사이 코딱지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도망을 간다. 화가 나서 뒤쫓아 갔다. 갑자기 철구가 휙 돌아서더니 인마, 넌 콧구멍 파는 재미를 모르지? 친구가 없는 철구는 콧구멍이 친구다.
2008-12-09 09:25이번 교원문학상 심사를 시작하면서 실은 기대감보다 불안감이 더 컸다. 혹시 좋은 작품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자꾸 앞섰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늘 시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시를 가르치는 일과 직접 쓰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기우에 불과했다. 의외로 좋은 작품을 쓰는 분들이 많았다. 작품 수준도 고르고 다소 높은 편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비교적 상식적이고 상투적이고 보편적인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기만의 생각을 드러내는 개성 있는 목소리가 크게 아쉬웠다. 시 부문에서 가장 개성이 두드러진 작품은 가작 ‘매미 울음을 볶다’이다. 이 시는 ‘울음’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볶는다’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이 놀라웠다. 어머니 첫 기일 날 ‘재수생, 대학생’과 ‘큰어머님, 작은어머님, 고모님, 누님들’로 표현된 식구들이 모여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과정을 퍽 활달하고 진솔하고 해학적으로 그려졌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한 것은 당선작에 비해 작품의 완결성이 좀 떨어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선작 ‘꿈꾸는 장롱’은 시적 완성도가 높
2008-12-09 09:24비가 그쳤습니다. 몇 그루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한결 정갈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약간의 햇살만으로도 겨울을 밀고나가는 저 나무들이 성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에 백열전등이 밝혀집니다. 노랗고 붉은 낙엽을 떨구고 환한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들처럼. 나무와 나무들 사이에 서있으면 나무들의 혼잣말이 들립니다. 나무들은 독백을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수다 떠는 인간의 풍속과는 사뭇 다릅니다. 나무는 그저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낄 뿐입니다. 나무들 곁에 서 있노라면 내 살갗에도 파란 움이 돋습니다. 한 때 나무들도 소리 내는 발성기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절주절 무성한 이야기로 골짜기를 메웠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깨어진 말과 언어에 상처를 입고, 결국 하나 둘 침묵으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나뭇잎을 가만히 보면 입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게 그 증거라 믿습니다. 말을 버리면서 나무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온 몸이 입술이고 귀이고 눈입니다. 욕심을 버린 나무가 마지막 진화한 모습, 나무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에 이른 셈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버리고 철저히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행
2008-12-09 09:22나만 그런 게 아닐 거야 누구의 집에 가든 장롱 열면 처박힌 옷 한 벌 쯤 눈에 띄지 오래됐지만 버리지 못하는 그렇다고 걸어두기도 멋쩍은 그런 옷 있지 누구나 옆구리 눌러보면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여자 하나쯤 감춰져 있지 벌개미취 냄새나는 삼십년 전 그대로 살아있지 풀을 먹이고 다림질해야 하는 추억은 보관이 중요해, 쓸쓸한 옷 나프탈렌 냄새나는 것일망정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해 그래야 수의로 입어 행복한 거야 가을볕 보송보송한 오후 바람 들어 시원한 이유 알겠지 문 닫아도 절로 빠끔히 열리는 장롱, 속을
2008-12-09 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