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있는 가운데 교사들은 2학기 수업준비를 위해 분주해지는 시점이다. 이때쯤이면 교사들은 수업에 필요한 교수․학습자료를 정리하고, 효율적인 수업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수업방법에 있어 1970년대와 2000년대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1973년 3월 11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신출(新出)교사 수업입문 7계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판서에 대한 구상 = 교사가 판서한 것은 학생들이 노트에 필기하므로 수업내용이나 요점을 한 눈으로 되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판서자체도 나열식으로 왼쪽 위부터 판서해 나가는 것보다는 칠판 전체의 중앙에 가장 중요한 것을 쓰고 이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써 나가되, 사전에 어떻게 판서할 것인가를 설정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판서의 구조화 내지 조직화를 위해 미리 준비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판서를 지우는 것도 어떤 부분을 끝까지 남겨서 학생들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키겠는가에 대해 전략적인 배려가 있어야 한다. ▲눈으로도 가르치자 = 수업이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하는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면 학생들이 한눈팔지 못하며, 큰 소리도 수업을 하는 것보다는 조용
얼마 안 있으면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8·15 광복절이다. 광복절은 우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피격한 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대구사범 은사인 김영기 선생님(당시 대한 삼락회 회장)에 대한 기사가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 실렸다. 1974년 8월 29일자 신문에는 “대통령 내외분은 대구사범 은사이신 김 회장을 매년 스승의 날마다 청와대로 초청하는 등 스승으로서의 대접을 아끼지 않았으며, 김 회장은 대통령 내외분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한 이래 두 분의 결혼생활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봐 왔다”고 했다. 김 회장은 와병 중에 육영수 여사의 타계소식을 듣고 “내가 몸이 이렇지 않다면 단숨에 달려가야 할 내가 이렇게 누워있다니. 대통령이 외로워서 어쩌나”라며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1974년 9월 12일자 신문에는 김 회장의 와병소식을 들은 박 대통령이 은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전했다. “뜻하지 않던 8·15의 흉변으로 저도 그동안 정신없이 지내느라고 소식을 진작 듣지 못하여 문병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초중등학교가 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이 되면 교원들은 각종 연수를 받거나 학위과정을 밟느라 여념이 없지만 다소 여유를 갖고 휴식과 휴가를 즐기기도 한다. 1967년 7월 24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삼복더위속의 납량작전’이란 기사를 통해 교원들의 휴가계획을 소개했다. “아무리 좋은 휴가계획을 세워도 최종결정은 휴가비가 내릴 것 같다. 절에 들어가 불경에 심취하겠다. 이번 휴가는 꼭 가족과 함께 가겠다. 맘에 드는 몇몇 동료와 설악산에 올라 바닷바람을 맞겠다. 취미가 되어버린 학습표본 수집을 하겠다.” 서울보광초 S교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여름방학에는 바다로 갈 결심이다. 부부 교사인 우리에겐 방학이 보너스다. 가정에서도 학교일을 생각게 되곤 하는데 이번 방학은 교사부부가 아니라 그냥 부부로서의 가정생활을 해볼까 궁리중이다”라고 해 부부교사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중앙고 L교사는 “간단한 여행구를 갖추고 해수욕장 기차에 오르는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진다. 태양이 내려 쪼이는 해변에서 그녀와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게을러지겠다. 신혼의 이 여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노을을 벗긴 창가에 그녀를 세워두겠다”고
대학교원과 달리 초중등 교원의 정치활동은 제한돼 있다. 이는 1962년 ‘교육의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 문구가 포함되는 개헌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원의 정책 참여는 교원단체를 통해 다양하게 표출해 왔다. 선거 공약을 개발․요구하고, 정당과 후보자의 교육정책을 분석해서 홍보하고, 출마자 초청 토론회를 개최 등의 활동을 했다. 1967년 3월 27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은 ‘선거공약과 교육계 출신 국회의원 후보들’ 기사를 통해 각 정당의 교육공약을 분석․게재하고 교육계 후보들의 명단을 소개했다. 같은 해 5월 1일자 신문에는 ‘교련 20년사의 증언’을 통해 “국회의원은 교육계 인사와 교육계 출신자, 그리고 교육을 이해하는 인사만을 엄선하여 교련(교총 전신)공천으로 출마시켰으며, 이를 위해 ‘임시특별회보’를 발간, 일선 회원에 배부하여 선거전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2000년 1월 31일자엔 “교원들은 졸속 개혁시책으로 교육경시풍조와 학교붕괴 현상을 초래한 장본인들이 이번 선거에서 심판받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번 총선을 통해 교육발전을 저해하는 의원이 낙선되고 교육발전을 지원할 선량들이 대거 선출될 수 있도
학생 생활지도는 예나 지금이나 교원들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교육당국이나 학부모, 사회는 학생들의 잘못을 일차적으로 교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학교 내외를 막론하고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학교 내외를 불문하고 교사가 책임져 왔다. 1975년 12월 25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방학 중 중고생 탈선하면 담임교사 문책키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교위(현 서울시교육청) 지시에 따르면 학교장은 담임교사를 비롯한 전 직원을 소집해 방학 중 자체생활지도계획을 수립하고 각종 음성써클, 그룹미팅에 대한 사전 정보를 입수하여 지도하며 담임은 학급내 리더를 중심으로 학생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해 사건을 사전에 예방토록 했다. 담당 장학사로 하여금 학교를 불시에 방문해 생활지도 실천 여부를 확인할 방침이다.” 다음해 11월 25일자 신문 기사 ‘오락·유흥비마련 방편으로 학생 매혈(賣血)행위 성행’에서는 “서울시교위는 학생, 특히 여학생들이 매혈행의가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각 학교에 이러한 학생이 없도록 철저히 지도를 펴 나가도록 지시했다. 매혈학생 중 70% 정도는 오락비 또는 유흥비 조달의 방편으로 매혈을 하고 있으며, 휴가
경제성장을 이룬 1960~70년대를 거치며 우리나라 국민들의 가치관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70년 8월 10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흔들리는 가치관’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전북교육연구원 한순택 연구위원(이리남초 교감)이 이리시(지금의 익산시)의 교원, 농민, 상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결과다. 한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소도시 시민의 전통적 가치관은 흔들리고 있다. 흔히 어떤 일에나 혈연, 지연에 끌리기 일쑤이고, 성공도 노력에만 따르지 않는다고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런 결과는 오늘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므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설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직원을 선발함에 있어, 학연·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을 쓰겠다는 의견이 전체 응답자의 75% 이상으로 나타났다. 그 중 교원집단은 93%가 ‘능력 있는 사람을 쓰겠다’고 해, 상인(78%), 농민(75%)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성공관에 대한 질문에서, 전체 응답자 중 83%가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응답하였는데, 동 질문에서도 교원이 상인이나 농민보다도 높은 반응을 했다. 취직관에 대한 물음에서 70
은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은어란 본뜻을 숨기고 자기들끼리만 알고 남이 모르도록 만들어 쓰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은어는 야유나 비속어, 풍자적 표현이 주류를 이룬다. 1970년 3월 30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인천교대(경인교대 전신) 3명의 학생이 초등학생들의 언어지도자료를 만들기 위해 한 실태조사 결과를 ‘놀랍고도 깜찍한 은어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어머니 뱃속에서 여덟달 반 만에 태어났다는 뜻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켜 ‘광복절’,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양가집 자녀’라고 하는 것은 성적표를 받았을 때 ‘양’ ‘가’를 많이 받기 때문, 학급의 평균성적을 낮춰 놓는다든지 남의 것을 뺏는 아이를 가리켜 ‘인간송충이’이라 한다. ‘붕어띠’란 말은 붕어는 물을 먹고 사는 살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머니가 훈계하는 것을 ‘짱알댄다’라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얘기를 귀찮은 소리로 묵살하려는 의도. 인물이 제멋대로 조화 없이 생겼다고 해서 ‘자유당’, 조물주가 만들다가 실수해서 흉하게 잘못 만들었다고 해서 ‘조물주의 실패작’이라 한다. 남의 작은 실수를 꼬집는 말로 ‘무식이 통통튄다’ ‘무식이 탁구친다’ ‘무식이
지금은 방과 후나 휴일에는 학교 시설물을 경비용역업체에 위탁관리하고 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교사의 일·숙직제도가 있었다. 일직은 여교사가 하고 숙직은 남교사들이 전담했다. 당시 숙직 교사들의 애환과 추억이 지금도 교직사회에 회자되어 웃음을 자아내곤 한다. 숙직실이 야간교장실 혹은 홀아비 냄새나는 금녀의 방이라는 별칭은 숙직 교사의 애환이 묻어나는 표현일 것이다. 또 교단 여성화가 심화된 현실에서 일숙직제도가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1966년 6월 28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 학교현장의 모습을 담는 ‘여운’(餘韻) 코너에 숙직실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숙직실은 야간 교장실이다. 숙직교사가 교장을 대리해서 밤새 학교에 관한 책임을 지며 때에 따라서 결정권까지 갖는다”고 자부(?)하면서 “실제로는 권한보다는 책임만 있는 곳이 야간교장실”이라고 했다. 또 숙직횟수는 교사 수와 비례해 교사 수가 적은 학교 특히, 벽지학교의 총각교사는 숙직실이 “야간 교장실이자 살림방이 되므로 홀아비 냄새와 더불어 고독이 어린 방”으로 묘사했다. “참새 떼처럼 재잘대던 꼬마들이 모두 돌아간 후 어둠이 내려 덮히고 붉으스레한 방범등이 조는 듯 서 있을 때면 넓디넓은
학부모들이 종종 자녀교육문제로 교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을 벌이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종종 있어 왔다. 지난주(6월 6일자) 본지에도 충남 공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부모가 동료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를 폭행했다는 것과 함께 교총의 진상조사와 경찰과 검찰에 대한 엄정 수사 요구 등의 활동 내용이 보도됐다. 이와 같은 교원폭행 사건이 1971년도에 몇 차례에 걸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 보도되었는데, 교권침해에 대해 교원들의 완곡한 입장표명과 당국의 엄격한 대응이 주목을 끈다. 1971년 1월 7일자 새한신문에는 강원 속초의 00초등학교에서 한 학부모 부부가 교사를 폭행한 사건을 보도했다. 6학년 4반 담임인 정 교사는 ‘어느 통지표 얘기’란 동화 한편을 자작하여 본지 자매지인 ‘새교실’에 게재했는데, 그 내용이 학부모 현 씨 자신의 가정사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수업 중인 정 교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했다. “이에 격분한 교직원 35명은 교권수호를 위해 집회를 갖고 정 교사에 대한 구타 사건에 항의, 집단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으며 동교 학부모 60여명은 현 씨 부부의 난동에 항의, 규탄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결국 현 씨 부부는 “00초등학교 3
최근 검찰에서 ‘방과후 학교’ 위탁업체를 대상으로 압수수색 조사를 했고, 몇몇 초등학교 교장의 금품수수사실이 밝혀져 징계처분을 받았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1966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색상표 강매사건’이다. 초등학교 색체교육 강화를 위해 당시 문교부는 고시를 통해 ‘한국색채연구소’가 발명특허한 색상표를 보급 권장했다. 문교부의 권장고시는 시·도교육위원회(현 시·도교육청)를 통해 각 학교에 시달되었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색상표 사용을 권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색상표 제작업체간의 과당경쟁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학교와 업자간의 비리문제로 불거졌다. 1966년 3월 29일자 새교육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최복현 서울교육감은 ‘부독본(副讀本) 강매행위로 말썽이 되고 있는 ‘색상표’는 문교부가 고시 149호로 발표한 것으로서 문교부가 색상표 보급 권장을 위해 공문으로 지시하는 한편 ‘발명특허권을 갖고 있는 한국색채연구소로부터 권장청원이 있어 이를 검토한 바 내용이 색채교육에 적절하니 각급학교 희망자에 보급 권장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밝혔다.” “문교부는 말썽난 색상표 강매사건에 대해 권장공문을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를 한다. 카네이션을 달아 주고, ‘스승의 은혜’를 합창하고, 선생님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사회적으로는 선생님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하고, 교육당국은 교육공로자들에게 표창행사를 한다. 이처럼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제자에게 헌신하는 수많은 교육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1975년 5월 8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전주시 관내 초등학교 교직원들이 ‘스승의 그림자회’를 조직, 불우한 제자들을 돕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780명의 교사들이 담배 아껴 피우기 등 절약운동을 펴 100만원을 모아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36명의 제자를 도운 것이다. 1992년 5월 20일자 신문에는 강원도 영월 탄광촌에 있는 한 중학교 교직원들이 정기적으로 돈을 거둬 불우제자를 돕고 학생들의 이발까지 도맡아 해 주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130여명의 생활이 어려운 제자들의 수업료를 대납해 주는 한편, 면지역임에도 이발소가 없어 17㎞나 떨어진 영월읍까지 가서 이발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불편함을 겪자 남교사들이 이발 기술을 터득, 이발을 해 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본지가 주최한
한국교육신문이 50번째 생일을 맞았다. 본지는 그동안 양적․질적으로 성장해오는 과정에서 매년 새로운 다짐을 해왔다. 창간 50년을 맞아 과거 10년 주기별로 밝혀온 본지의 다짐과 결의가 어땠는지 반추함으로서 또 다른 10년을 위한 다짐을 하고자 한다.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1971년 5월 15일자 신문에서 당시 임영신 대표는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은 70년대에 걸고 있는 국가 민족의 우람찬 기대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독자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또 전진을 위한 기탄없는 비판을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흩트러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도 약속합니다”라고 밝혔다. 1981년 5월 14일자에선 사설을 통해 20년을 회고하면서 교육언론으로서의 가야할 4가지 좌표를 제시했다. “첫째, 우리 교육언론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깊이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서 교육언론의 길을 걸어가려 한다. 둘째, 교육전문지는 소외된 자의 편에 서야 할 것이며, 우리는 이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 셋째, 우리는 교육전문지가 갖는 전문성에 보다 투철하고자 한다. 넷째, 교육전문지는 교육계에 있는 교원의 반려자라는 사실을 명심하고자 한다.” 30주년(1
교육계에서 개최하는 행사에서 국민의례 시 종종 순국선열 및 순직교직자에 대한 묵념을 한다. 그때마다 참석한 사람들은 막연하나마 순직교직자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숙연해진다. 스승이 있는 한 순직교직자는 언제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경기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건이다. 한국교육신문 1999년 7월 5일자에 의하면, “지난 6월 말 수련원 화재로 어린이 19명과 마도초등학교 김영재 교사(38세) 등 4명의 어른이 숨졌다. ‘불이야’하는 소리에 깨어난 김 교사는 유독가스가 자욱한 복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잠자던 어린이들을 대피시키고 자신은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19일자에는 한국교총장학회가 김 교사의 유자녀 2명(초등학교 3년, 5년)에 대해 대학 4년까지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1975년 11월 6일자엔 “경남 양산초등학교 김인자(24세) 교사가 이 학교 5~6학년 1백90명을 인솔, 양산천에서 동료교사 2명과 함께 야외교육에 나섰다가 2명의 어린이가 물놀이중 급류에 휘말리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익사, 순직했다. 정부는 김교사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국민
1982년 1월 28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전두환 대통령은 109회 임시국회 본회의 국정연설(‘82.1.22)에서 올해를 ‘교권확립·교사양성제도의 개혁, 교육풍토 개선의 해’로 삼겠다”는 발표를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전 대통령은 이어 “사회는 교사를 존경할 줄 아는 상황이 도래해야만 비로소 교권이 확립될 수 있다.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또 5월 17일자 신문은 5월 11일 국무회의에서 5월 15일 스승의 날로 정하고 법정기념일로 공포했다고 하면서, 당시 문교부 차원에서 “홍보탑 설치, TV, 라디오, 신문을 통한 홍보, 모범교원 위로 행사, 옛 스승 찾아뵙기 운동, 은사의 밤 개최 등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고 보도했다. 10월 4일자에는 국회 문공위 심상우 의원이 ‘교권보호특별조치법’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심 의원이 발의한 법안의 주요내용은 ‘교원의 사회적 지위 우대와 보호, 교육활동의 자율성과 신분보호, 교육현장에서의 권위실추와 명예침해 방지, 각종 학교사고로부터의 정신적 불안해소, 교육활동을 위축케 하는 부당한 언동에 대한 가중처벌’ 등이다. 30여 년전에 제안된 교권보호법안이라고는 하지만 200
교원이 교직을 떠나는 데는 자의든 타의든 다양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일시에 많은 교원이 퇴직하는 데는 항상 부실한 정책적 문제가 대두된다. 1990년대 말 IMF 직후, 고령교원 1명이 퇴직하면 3명의 신규교원을 채용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교원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단축했고, 2000년대 말에는 3~4년 동안 공무원연금개혁 논의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연금불안으로 인해 많은 교원이 교단을 떠났다. 1960년대에는 열악한 보수와 근무조건으로 인해 일시에 많은 교원이 퇴직하는 일이 벌어졌다. 1968년 2월 19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대한교련(한국교총 전신)이 각 시․도교육회(시․도교총의 전신)를 통해 조사한 교원퇴직현황을 보도했다. “초·중등교원의 퇴직률이 1963년 2.43%, 1966년 4.47%, 1967년 7%로 늘어났다. 5천1백40명의 퇴직교원 가운데 정년퇴직 교원은 1백명 내외이고, 나머지 5천여명은 중도사퇴교원이다.” 중도사퇴 사유로는 ▲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순환근무제 운영의 불합리 ▲벽지교사에 대한 시책 불충실 등 여러 가지를 제시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타 직에 비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