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끝은 황량한 것일까? 맑고 투명한 대기를 가을 햇살이 반직선으로 지나간다. 햇볕은 따갑지만, 그늘은 서늘함을 머금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발소리로 가득할 추석날인데 썰렁하기 짝이 없다. 긴 골목을 들어서자 채마밭가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껍질에 이끼를 두른 늙은 단감나무 한그루가 힘없이 서 있다. 벌레에게 먹힌 상처투성이 잎과 몇 개뿐인 가지는 긴 시간을 말하고 있다. 언제 장에서 사왔을까? 가을배추 모종이 대문간 리어카 그늘에서 힘없이 이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에 심어서 김장 담가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었나 본다. 장독대 옆 대봉감나무도 허전한 추석을 맞고 있다.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개량 기와지붕으로 바뀌는 수십 년의 생활을 말없이 지켜본 산 증인이다. 이제 나무도 늙었는지 올 여름의 불볕더위에 지쳤는지 미처 익기도 전에 떨어진 감들은 시멘트 바닥에 으깨어져 시큼한 냄새와 가을 파리만 불러 모으고 있다. 추석날 이른 아침이다. 둘째 녀석은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외가에 갈 거라고 기대를 모은다. 그런데 울리는 전화소리! 수화기를 든 아내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한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아이의 외삼촌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외할머니께서
한낮 수은주가 30도를 넘는 날씨가 연일 계속된다. 거리를 걸으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사람들은 작년보다 더 덥다 하고 방송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전 세계의 기상이변의 모습과 국내에서 확산하는 적조와 녹조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을 보도하고 있다. 일련의 이런 현상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이며 지구의 몸부림 아닌가 한다. 더구나 북극의 빙하가 녹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소식은 앞으로 더 심화될 기상이변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과 호흡을 맞추듯 올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영화가 ‘설국열차’이다. 이 영화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정상들이 모여 검정 되지 않은 CW-7이란 물질을 하늘에 살포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갑자기 닥쳐온 빙하기 앞에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얼어 죽는다. 생존자는 오직 현대판 노아의 방주에 해당하는 윌포드가 만든 열차에 탄 사람뿐으로 부와 권력을 이용해 승차권을 산 사람은 앞 칸에, 부도 권력도 없는 사람들은 꼬리 칸에 무임승차하여 17년 동안 열차를 타고 지구를 달리면서 다양한 갈등의 모습을 전개한다. 설국열차는 1,001칸으로
계속되는 고온과 뜨거운 열기로 팔월 초순의 하루하루는 끈끈한 풀처럼 달라붙는다. 날씨가 더우면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활동을 많이 한다. 이런 활동의 부대낌과 삶이 묻어나는 때가 장날이다. 오일장 아침의 다채로운 풍경! 고구마순과 푸성귀 등속을 좌판에 펼쳐놓고 손길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에서 세월의 이야기가 수묵담채화처럼 번지고 있다. 며칠 전 일이다. 아이의 외할아버지 제사라고 늦은 오후 시간 처가를 찾았다. 홀로 팔순을 바라보는 장모님은 지난해보다 허리가 더 굽어 노쇠함이 역력하였다. 하지만 더위도 상관없이 땀방울을 훔치며 집안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자식들 갈 때 가져가라고 이것저것 챙기는 것을 보니 죄스러운 마음이 하염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모습보다 더 가슴을 아리게한 일이 있었다. 제사 시간을 기다리며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둘러앉아 밤하늘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작년과는 달리 두엄냄새며 파리, 모기의 성가심이 덜해 외양간을 보게 됐다. 작년 같았으면 벌써 손자 손녀들이 외양간 여물통 앞에서 짚을 주고 어미 소의 콧방귀 소리와 송아지 울음소리가 울렸을 것인데 올해는 외양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문득 지난 이월 장모님의 말씀
칠팔월의 태양은 뜨겁다. 춘분을 지나 자꾸만 높아지는 태양의 고도는 계절과 시간의 흐름이란 공전주기를 타고 따끔따금한 열선으로 사정없이 지표면을 찌르고 있다. 이제 온 지상은 짙은 초록 물결의 여름에 잠겨있다. 하지만 이 성하의 계절도 잦아지는 매미 소리와 여치, 베짱이 노랫소리가 들리면 저만큼 물러날 것이다. 다가섬과 물러남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다가설 줄만 알았지 물러설 줄을 모르는 형태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부류가 사람이 아닌가 한다. 열흘 전 사소한 부주의로 발목을 다쳤다. 병원으로 가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큰일이다를 연발하며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묻기도 전에 심한가요? 낫는데 얼마나 걸려요? 깁스 안 하면 안돼요? 목발 짚지 않아도 되지요? 하며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었다. 의사 선생님은 물끄러미 쳐다보며 환자가 보기에도 괜찮은 것 같아요. 입원하여 다리를 매달고 누워있어야 한다고 진단을 하였다. 하지만 할 일이 많고 바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의사 선생님은 망연자실한다. 하는 수 없이 반 깁스만 하고 절뚝거리며 병원문을 나서는 순간 장대 같은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에이 날씨도 내 편이 아니군. 왜
길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모든 방향으로 나 있는 길. 그것을 선택하고 걷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하얀 밤꽃이 흐드러지게 핀 유월 초순. 여름의 시작인 장마를 코앞에 두고 바래길을 걷는다. 출발지 상주은모래비치 솔숲엔 고운 선율의 동요가 솔 향기를 타고 흐르고 출발을 기다리는 얼굴에는 기다림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길을 언제 누가 걸었을까? 피아노 소리를 뒤로 같은 코스를 걷는 사람들. 타인과 타인이 만났으면서도 목적지가 같다는 까닭으로 같이 걸음을 옮긴다. 수산종묘 배양장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른다. 거리가 주는 미학, 상주은모래비치의 곡선이 더 아름답다. 포장도로를 벗어나자 본격적인 산길 걷기가 시작된다. 수풀로 우거진 산길엔 청미래 열매, 산새 소리, 파도소리가 오감을 파고든다.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오르막도 되며 너무 가팔라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길이 이어진다. 다양한 길의 형태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은 참 여유롭다. 느리게 움직이며 걷는 일은 빠른 생활 습성에 젖어든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느림 자체가 생각을 더 깊게 하고 일상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인적 드문 산속 무
하얀 찔레꽃이 밭 언덕을 수놓은 유월이 시작됐다. 유년의 기억에 자리한 유월은 짙어지는 초록빛, 누런 보리밭, 탈곡 후 뒤끝을 태우는 자욱한 연기 가득한 들판으로 남아있다. 요즘은 봄이 실종된 것 같다. 송홧가루 날리는 사월과 신록의 계절인 오월이 언제 곁에 있었는지도 아른한 채 열기를 머금은 여름이 벌써 손을 내민다. 일곱 명이 주인인 교실, 더워지는 날씨로 창문을 자주 연다. 정오를 지나면 먼바다와 섬 이야기를 머금은 해풍이 아이들 곁으로 다가온다. 책상 위 종이가 날리고 환경게시물이 펄럭이고 이름 모르는 새소리가 교실을 머물다 금산 자락으로 빠져나간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께 새집 다오.” 음악 시간 전래동요를 익히다 두꺼비가 어떻게 가냐고 묻자 개구리처럼 뛴다는 아이, 엉금엉금 기어간다는 아이 등 의견이 분부하다. 그리고 두꺼비 집 짓는 놀이는 어디서 하냐고 묻자 모두 모래밭에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5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찾는다. 비둘기도 울고 까치도 날고 조그만 텃밭에 갈무리 되고 있는 마늘은 매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툭 튄 바다와 넓은 모래사장을 보자 약속이나 한 듯 내달린다. 어제까지 비바람과 천둥을
남해는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다. 꽃 폭탄의 화염이 연초록에 파묻히고 신록들은 산허리를 돌아 햇볕에 싱그러움을 반짝인다. 봄은 남에서 북으로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이런 원색의 봄도 고층빌딩과 넘쳐나는 차량의 행렬 속에서는 심한 몸살에 앓는지 서울의 봄은 핏기 잃은 모습으로 다가선다. 스무 명의 초록 동이들과 갯바람 싣고 서울구경을 나선 사월 말.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선 곳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인왕산 자락 옛 모화관 자리, 자유의 진공지대 또는 ‘자유를 박탈하는 곳’이라고 알려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상징인 붉은 벽돌담이 백화현상으로 얼룩진 채 봄바람을 맞고 있다. 형무소와 감옥을 방문하는 것은 두 번째이다. 처음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의 뤼순 감옥 그리고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이다. 그곳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죽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악마성이 내재한 곳으로 꿈에서도 보기가 두렵다. 이 두 곳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은 피지배 민족의 수난사가 배어있다. 그리고 눈을 멀리 돌리면 2차 세계대전 당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에 의해 자행된
하늘이 파랗다. 실바람이 싱그럽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 속에 꽃비는 산 정상을 향해 비상하고 희망과 재생의 열기가 온 대지를 물들인다. 땅 위의 봄이 연초록 실루엣을 토하면 봄의 여신은 하늘빛을 품은 물감을 바다에 풀어놓는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바다색의 합창이 하모니를 이루어 강진만을 지나 앵강만을 물들이고 동대만에 유채색 봄 물결을 수놓는다. 일찍 요절한 시인 이장희는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꽃가루같이 부드러운 고양이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우러지도다”라고 읊었다. 봄!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들이 요동하는 계절이다. 작년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출퇴근길일 때 봄의 정경은 겨우 앞산 산허리를 분홍빛 투명 물감으로 물들이는 정도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근무지가 옮겨진 지금 반 시간 남짓 가는 출근길은 다양한 산과 들, 바다와 어우러진 보물섬의 봄이 눈을 황홀캐 한다. 남해는 따뜻한 곳이다. 그런 만큼 다른 지역보다 봄꽃의 개화시기가 빠른 편이다. 삼월 중순 아침 아직 찬 기운의 여운이 가시잖은 읍내를 벗어나 입현마을 고개를 넘는 순간 아기 손바닥 같은 새하얀 목련들이 도로 양편에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봄의 왈츠를 선물한다. 선물 받기를 싫
『산 너머 남촌(南村)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四月)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은 오월(五月)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南村)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데나.』이 글귀는 파인 김동환이 지은 ‘산 너머 남촌에는’시 일부분이다. 이 시를 읽으면 부드러운 봄의 전령이 이마를 입맞춤하고 꿈길 속을 거닐게 하는 오감이 융합되는 느낌을 준다. 우수가 지났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산 너머 남촌에 사는 봄의 여신이 생동감으로 잿빛 겨울 흔적을 밀어내고 파스텔톤의 봄을 연하게 칠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겨울과 봄의 흔적이 교차하는 요즈음 떠남과 새로운 만남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이월 말과 삼월 초에 있는 졸업과 입학, 새로운 근무지를 향하는 작은 흔적이다. 떠남이 있는 자리는 항상 흔적이 있다. 세월의 흔적은 까만 머리카락 속에 발견되는 흰 머리카락이며 새로운 비상을 향해 떠난 둥지에는 성장시켜주고 생활을 이어온 깃털이 흔적으로 남는다. 이 지구 상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그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남은 흔적들이 빛이 나고 본보기가 되는 것들이라면 떠남의 시점에 얼
‘인간과 멸치의 세 가지 공통점은 첫째. 좁은 문을 좋아한다. 둘째, 남 따라 한다. 셋째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이 말은 2012년 11월에 발간된 박진욱의 ‘바람과 이슬로 몸과 마음을 씻고 조선의 귀양터 남해 유배지를 찾아서’ 중 지족해협 죽방렴을 찾은 대목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의 시작은 유배객 후송 류의양이 처음 건넜다는 노량에서 문을 연다. 그리고 한 여름날 자전거에 다리품을 팔아 남해의 곳곳을 돌아보며 옛 문헌과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한 포토에세이 형태로 발간되어 남해에 담겨있는 사연을 누구나 쉽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책을 읽어보면서 지은이가 남해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보다 더 남해에 관한 역사와 민담, 설화를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지금껏 남해를 떠나본 일이 없는 남해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앞섰다. 남해를 더 잘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 남해유배문학관이 건립된 이후 2012년에 제3회 김만중 문학상시상식이 있었다. 그 중 소설부문에 임종욱의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뒤이어 제1회 김만중문학상수상작 독후감 대회와 전국 유배문학스토리텔링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서히 유배문학에 대한 관심
노도에서 외쳐 부른 그리움의 노래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를 읽고- 그리움이 사무치면 바람이 되고 별이 되리라. 금산 아래 한 점 섬 노도는 자개처럼 반짝이는 앵강만을 뒤로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열세가구 노도의 집들은 한양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호구산과 망운산을 바라보는 섬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섬의 동쪽 응달진 곳엔 파도소리에 애환을 싣고 보리암을 바라보는 세월을 간직한 김만중의 초옥이 있다. 그 초옥 주변엔 해마다 봄소식이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면 그리움을 물들인 동백꽃은 나무에서 땅에서 붉은 빛을 바래며 두 번씩 눈물을 흘린다. 남해에 살면서도 김만중의 일대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단순히 한글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조선 시대 유배객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사람됨과 남해에 유배 온 삼 년 동안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임종욱 작가의 소설은 이런 무관심에 불을 댕겨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책의 표지에 실린 바닷바람에 몸을 갉혀 먹히며 서안 앞에 대추처럼 마른 모습으로 붓을 든 사람이 바로 김만중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
지란지교(芝蘭之交)란 한자 성어가 있다. 이 말은 명심보감의 교우 편에 나오는 것으로 공자는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향기를 맡지 못하니, 그 향기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절인 생선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악취를 맡지 못하니, 또한 그 냄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붉은 주사를 가지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옻을 가지고 있으면 검어지게 되니, 군자는 반드시 함께 있는 자를 삼가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지란지교는 벗을 사귈 때는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롭고 맑은 사귐을 가지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벗 사이의 변치 않는 사귐을 일컫는 한자 성어로는 관포지교(管鮑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수어지교(水魚之交), 죽마지우(竹馬之友) 등이 있는데 모두 벗 사이의 두터운 우정을 가리키는 성어들이다. 벗, 친구! 참 좋은 말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다. 드라마 상도에서 ‘장사는 부를 남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남기는 것이 진정한 장사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말은 신뢰를 동반한 사귐이 사람에게서 제일 중요 하다는 뜻이
대설은 중국 화북지방의 기상을 기준으로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으로 소설 15일 후 동지이전까지의 24절기 중 하나로 누런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들기 시작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날 공교롭게도 남해에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렸다. 기상청 발표에 의하면 적설량이 4센티미터 이상이라고 했다. 눈 구경하기 어려운 따뜻한 남해에 내리는 함박눈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선생님 눈이 와요!” 아이들은 수업시간 내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수업을 하였지만, 창문 쪽에 앉은 녀석들은 눈이 온다고 눈빛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알리자 용수철처럼 튀어서 실내화 바람으로 밖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비둘기가 나무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고 할 수 없이 재량으로 쉬는 시간을 조금 더 주며 놀다가 운동장 시계를 보고 약속 시각 맞추어 수업에 참여하라고 하자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내 하늘은 어두워지며 싸락눈도 나비눈도 아닌 함박눈을 펑펑 내리붓는다. 금세 주변은 새하얗게 변한다. 가까운 뒷산에서부터 멀리 망운산까지 온 세상이 은 세상이 되었
지난달 지나간 태풍 산바의 흔적이 가을색 깊어지는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일찍 가을걷이를 마친 마늘밭의 스프링클러가 가을비의 인색함을 원망하듯 힘겹게 돌아간다. 노도 가는 길! 남해에 살면서도 지나치며 바라보기만 하던 곳을 찾는다. 노를 많이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섬 이름! 서포 김만중의 유배 섬이기도 한 그곳을 가기 위해 가을빛 짙어 가는 앵강만 벽련마을 선착장에서 손전화로 사공을 부른다. 벽련에서 노도로 가는 짧은 바닷길. 배의 속력에 물살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뱃전에 부서지고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린다. 시선을 돌리자 호수처럼 잔잔한 앵강만 곳곳에 떠 있는 정치망 부표와 낚싯배들, 자개처럼 반짝이며 잔물결 이는 바다는 에메랄드빛을 풀어낸다. 이 바닷길을 서포 김만중도 건넜을 것이다.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을 가진 이의 발걸음과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위해 가는 이의 발걸음은 어떠하였을까? 쾌속선도 아닌 삐걱거리는 노 젓는 소리에 멀어지는 남해도와 가까워지는 노도 사이에서 얼마나 절망하였을까? 절망의 깊이는 멀어지는 거리만큼 더하고 그리움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자 배는 벌써 노도 마을 선착장에 도착한다.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다. 마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오월 말! 신록은 짙은 녹색을 두르며 유월로 향하고 있다. 섬진 강변 19번 국도. 흐르는 강물과 지리산 골짜기를 내달아 온 바람은 지난날 아픈 역사를 되새기며 국토의 소중함을 보듬게 한다. 시암재를 거쳐 성삼재로 향하는 길목. 주말을 맞아 형형색색의 등산복으로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잠깐 숨을 고르며 내려다본 지리산 자락. 그 형세는 마치 무명치마의 주름처럼 화려함도 빼어남도 아닌 수수한 모습으로 국토의 소중함을 되새김질 하게 한다. 하지만 푸른빛과 산들바람에 묻힌 지리산이지만 그 아픈 상처를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요동치는 세월의 흐름에 아픔을 체험한 구세대는 한걸음 물러나고 신세대의 파고는 높기만 하다. 성산재를 넘어 도착한 뱀사골 탐방안내소. 그곳에는 이념에 의하여 엮어진 피비린내나는 우리의 현대사가 남아있었다. 안내소 2층의 전시관을 보며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둘째 녀석이 빨치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빨치산은 프랑스어의 당원이라는 파르티에서 온 말로 유격대원, 게릴대원이라고 하자 유격대원은 뭐고 게릴라는 뭐냐고 되묻는다. 설명을 해 주었지만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리고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류를 보며 인간의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