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쳤습니다. 몇 그루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한결 정갈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약간의 햇살만으로도 겨울을 밀고나가는 저 나무들이 성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에 백열전등이 밝혀집니다. 노랗고 붉은 낙엽을 떨구고 환한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들처럼. 나무와 나무들 사이에 서있으면 나무들의 혼잣말이 들립니다. 나무들은 독백을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수다 떠는 인간의 풍속과는 사뭇 다릅니다. 나무는 그저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낄 뿐입니다. 나무들 곁에 서 있노라면 내 살갗에도 파란 움이 돋습니다. 한 때 나무들도 소리 내는 발성기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절주절 무성한 이야기로 골짜기를 메웠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깨어진 말과 언어에 상처를 입고, 결국 하나 둘 침묵으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나뭇잎을 가만히 보면 입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게 그 증거라 믿습니다. 말을 버리면서 나무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온 몸이 입술이고 귀이고 눈입니다. 욕심을 버린 나무가 마지막 진화한 모습, 나무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에 이른 셈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버리고 철저히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행
2008-12-09 09:22나만 그런 게 아닐 거야 누구의 집에 가든 장롱 열면 처박힌 옷 한 벌 쯤 눈에 띄지 오래됐지만 버리지 못하는 그렇다고 걸어두기도 멋쩍은 그런 옷 있지 누구나 옆구리 눌러보면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여자 하나쯤 감춰져 있지 벌개미취 냄새나는 삼십년 전 그대로 살아있지 풀을 먹이고 다림질해야 하는 추억은 보관이 중요해, 쓸쓸한 옷 나프탈렌 냄새나는 것일망정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해 그래야 수의로 입어 행복한 거야 가을볕 보송보송한 오후 바람 들어 시원한 이유 알겠지 문 닫아도 절로 빠끔히 열리는 장롱, 속을
2008-12-09 09:18민족과 국가를 위한 절대주의자 민족사의 무대를 대륙으로 확장해 타협 없는 이상주의는 옥의 티 날카로운 필력(筆力)으로 계몽 나서 단재 신채호는 1880년 충청도 회덕에서 태어나 1936년 중국 여순(旅順) 감옥에서 타계했다. 어린 시절을 회덕 어남리에서 보낸 단재는 여덟 살 되던 1887년 부모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옮겨가서 형 재호와 함께 서당을 시작으로 학업에 정진했다. 가난했지만 10여 세에 사서삼경을 읽을 정도로 명석했던 그는 다른 학생보다 빠르게 1898년 성균관에 들어가서 1905년 성균관의 박사가 된다.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청년이던 단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전후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민족사를 통하여 국운을 일으켜 보고자 한 그의 노력은 1908년 ‘독사신론’과 같은 논단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러한 정신은 훗날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는 기초가 된다. 단재는 풍전등화의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구국의 영웅을 소설로 표현하기도 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민족영웅을 통하여 위급한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을지문덕전’과 같은 전기소설로 창작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2008-12-08 11:24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들라 하늘나라 아기별도 엄마 품에 잠든다. 둥둥 아기 잠 자거라 예쁜 아기 자장 어느 누구에게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어떤 노래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라는 답변이 제1순위에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듬이나 음정은 잘 맞지 않아도 아기를 안고 조용히, 부드럽게, 그리고 사랑을 담뿍 안고 부르는 엄마의 자장노래야 말로 천사의 노래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시절 엄마 아빠가 불러주는 자장노래를 들으며 자란 기억도 있겠지만, 또 엄마나 아빠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자장가 한 두곡쯤은 알고 노래를 불러 주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곡가가 작곡을 하던 ‘자장가’의 제목은 대게 동일하다. 그래서 작곡자의 이름을 앞에 붙이는 것으로 곡을 구분하기도 한다. 흔히 불리는 자장가로 외국 곡 중에서는 ‘슈베르트의 자장가’,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알려진 ‘풀리스의 자장가’, ‘브람스의 자장가’ 등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민요 ‘자장가’를 비롯해서 ‘이흥렬의 자장가, ’김대현의 자장가‘ 등이 대표적이다. 김대현의 ‘자장가’는 아동 문학가 김영일이 가사를 지었는데 원래 ’예쁜 아기 자장‘이라는 부제가 붙
2008-12-04 11:20우리는 슈베르트(1797-1828)를 가리켜 ‘가곡의 왕’이라고 부른다. 그는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무려 1000여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가곡만 603곡으로 절반 이상이나 된다. 작품 수로 보아 당연히 붙여지는 별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기악곡에서도 폭넓게 우수한 곡들을 남겨 가곡만의 왕이 아닌 위대한 작곡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음악가들이 봉건체제의 귀족들이나 사제들에게 예속당해 그들의 취향에 맞춘 형식주의에 의한 순음악 중심으로 창작을 했다. 1800년 프랑스 혁명 이후 예술분야는 그 철학적 기조가 점차 인도주의 성향으로 기울면서 음악 또한 인간 존중, 감정의 충실, 작곡자의 개성적 표현에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샹송이나 멜로디라 부르는 가곡이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한 독일 권역의 음악은 기악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때마침 괴테나 실러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이 나타나 훌륭한 시를 많이 내놓기 시작했다. 슈베르트는 이 시에 멜로디와 피아노반주를 붙임으로써 시(詩)와 음악의 결합인 ‘예술가곡’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음악에 붙임’
2008-11-26 11:21요즈음 찬바람이 불면서 길가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종종 걸음을 걷는가하면 가로수 나뭇잎도 낙엽이 되어 흩날린다. 이에 쓸쓸한 정감이 절로 스미면서 자연스레 생각나는 노래가 있으니 바로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 시는 박목월(1916-1978) 시인의 작품으로,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서 이 시에 얽힌 대략적인 사연을 밝히고 있다. 첫 번째 만남은 오월 어느 날 오후, 대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녀는 연한 하늘빛 갑사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그 다음의 재회는 화약 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한 모퉁이 에서였는데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세 번째 만남은 어느 봄날이었는데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저편에서 흰옷을 입고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걸어오는 그녀를 보게 된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중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달라고 청한다. 병실에서 만난 그녀는 연두 빛 치마에 반회장저고리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는 축배를 든다. 꽃병에는 개나리꽃이 꽂혀
2008-11-20 13:33사랑이여 우리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서로서로 근심 걱정 나누며 살아 왔네. 근심걱정 나눌진대 그 무엇이 두려워 그대는 나의 생명, 나의 온갖 즐거움. 요즈음 작곡가 ‘베토벤’의 이름이 붙은 제목의 TV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음악가들의 색다른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이래저래 베토벤의 이름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베토벤은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 독일에서 활약하던 고전파 음악가로 봉건체제 속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의 신동 모차르트처럼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기 때문에 부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2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당대의 대음악가이자 선배인 하이든에게 인정을 받아 귀족들의 후원을 얻게 됐고,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그는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면서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예속된 가운데 활동했으나 베토벤은 후원은 받아도 결코 예속되지 않았고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했다. 타협을 모르는 강한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성격도 작용했겠지만 남다른 철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생
2008-11-20 13:30박연폭포 흘러내리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 에에에 에루아 좋구 좋다. 어어어 럼마 디어라 내 사랑아. 박연폭포하면 예로부터 명유 서경덕과 명기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절경에 속한다. 황진이가 그 절경에 크게 감탄하며 시를 지었다는 폭포의 물줄기는 황진이의 아름다운 자태와 풍류마저 떠올리게 한다. 이 민요의 '간데 마다 정들여 놓고 이별이 잦아서 못 살겠네'라는 2절 가사에서는 한 사람에게 정착할 수 없는 기녀의 삶에 대한 황진이의 마음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민요는 타지방 민요에 비해 대체로 시김새(서양의 꾸밈음과 같은 형태의 잔가락)가 많지 않아 선율이 깨끗하고 경쾌하며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타지방 민요에 비해 세련된 선율이라는 점이나 내용이 당시의 기예를 공부한 기녀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경기민요는 주로 기녀들이 만들어 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한 때 민요를 부르는 일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의 필요성과 새로운 문화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통음악과 예술을 필히 계승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2008-11-10 09:33가곡은 시와 선율, 그리고 피아노 반주로 구성된 음악 양식이다. 즉 '시'가 '선율'을 통해 의미와 감정이 실린 노래로 표현될 때 '피아노 반주'가 화성적으로 조화롭게 뒷받침되면서 비로소 예술적인 노래 양식으로써 완성된 작품이 될 수 있다. 이 노래는 위의 악보에서 보는 것처럼 아르페지오(화음의 각 음을 연속적으로 차례로 연주·펼침화음)로 된 5마디의 짧은 피아노 전주로 시작되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먼 고향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회상에 젖게 하는 향수의 전주곡이라고나 할까. 이 곡은 전주가 시작될 때부터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 곡만큼 피아노 반주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화롭게 극대화 시키고 있는 곡도 드물다. 어디 반주뿐이랴, 선율 또한 시적인 분위기를 타고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한 폭의 동양화를 눈으로 보고 있는 듯 정겨움과 향수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작곡자 이수인은 1939년 마산 대성동 무학산 밑에서 태어났다. 당시 초등학교 교장인 부친으로 인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 사택에서 피아노를 치고 놀면서 음악을 배웠다. 그가 음악적 영감을 받은 곳은 전설이 스며있는 마산 앞 바닷가의 아름다운 섬 '돝섬'(돼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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