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한도 많은 대수능.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절차탁마의 위업을 이룩한 한국 교육 제도의 한 단면이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다. 전자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수험생의 치팅을 막기 위해 전자탐지기를 지닌 채 수험생을 감독하는 감독관, 그것도 모자라 수험실에는 감독관이 한 명이 아닌 두 명, 세 명이 한 교실에 배치되어 수험생을 지켜보는 것은 교육상 신세대와 기성세대들에게 바람직한 일일까? 한국의 언론뿐 아니라 영국의 전문 언론 채널 BBC 뉴스에서조차 풍자적으로 시험 장면을 보도하고 있다. 대수능의 명칭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1969년에 처음 실시한 ‘대학입학예비고사’ 제도는 대학생의 양적 팽창에 따른 질적 저하를 방지하여 교육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사학의 무한정한 정원 외 학생모집을 억제하여 정상적 운영을 기하도록 하고, 대학간의 질적 격차를 해소시켜 대학의 평준화를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81년부터 대학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예비고사 성적은 고교 내신 성적과 함께 대학입학시험 성적에 반영되었고, 82년에 ‘대학입학학력고사’, 94년에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명칭과 내용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대학입학예비고
2005년 11월 9일 보도된 오마이 뉴스 인터넷 기사에 “지난 8월말 초등학교 평교사로 정년퇴임한 노형근(64·전 안산성포초등학교 교사)씨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수여하는 녹조근정훈장을 받을 자격이 됐지만 거부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실려 있다. 그가 훈장을 거부한 이유는 “죄인이 무슨 포상이랍니까?"이다. 교원 생활을 하는 동안 학부모로부터 돈봉투를 받은 사실이 있기에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훈장을 받지 못하겠다는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퇴직교원 정부포상을 보면 1등급 청조훈장, 2등급 황조훈장, 3등급 홍조훈장, 4등급 녹조훈장, 5등급 옥조훈장이 있다. 황조훈장 이상은 근무경력이 40년 이상 되어야 하고, 홍조훈장은 39〜38년 근무 경력, 녹조훈장은 37년〜36년 근무 경력, 옥조훈장은 35〜33년 근무 경력이 있어야 한다. 30년 이상 33년 미만은 근정포장, 28년 이상 30년 미만은 대통령 표창, 25년 이상 28년 미만은 국무총리 표창, 15년 이상 25년 미만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표창을 받게 된다. 이처럼 훈장을 받는 것은 몇 시간을 소비하고 받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세월만 지켜갔다고 해서
교원평가제가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바탕 휩쓸고 간 뒷자리에는 학교에 대한 사회인의 인식과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인식이 겨울철의 싸늘한 기온과 같아지는 것 같다. 존경받아야 할 교직사회가 외부의 힘에 의해 흔들리는 시대적 전환기에 교사로서 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교사가 있는 앞에서 예사로 친구들과 재잘거려도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지 않는 파렴치한 모습들, 책상 위에 엎드려도 그것에 구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학생들, 그들의 앞에 서서 그것을 보면서 수업을 지속하는 교사들. 이런 교실은 썩고 병든 교실임에는 틀림없다. 학생이 책상 위에 엎드리면 불러서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다음부터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지도가 있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단계적인 조치를 취해 학생의 바른 수업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 엄한 교사이기에 그 수업 시간은 떠들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서 우선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선생님이 지도하는 수업시간이라도 졸지 않은 반은 얼마든지 많다고 한다. 많은 학생을 지도하다 보니, 아니 오랜 교직경험에서 학생을 대하다 보니 학생지도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려 오히려 새로운 신임교사 수업
교원평가제가 싸늘한 겨울 날씨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학교의 개혁을 외치고 나선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학교를 온통 벌집 쑤시듯 하더니, 이제는 교사를 평가해야 하겠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교원평가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한다. 하지만 교원평가제가 이미 대학에서 시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결과가 성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 따져볼 일이다. 대학 교수가 교원평가제로 인해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평가제의 실효성이 유야무야 형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현실에서 굳이 교원평가제를 강행하겠다는 저의는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교원평가제를 시행하는 단계도 소리 없이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새롭게 채용되는 교원부터 계약제를 시행하는 방안이 우선 고려된다면, 그것이 바로 신임 교사에게는 학생에게 온갖 열정을 다하는 첩경이 됨은 현장에 있는 교원은 느낄 것이다. 교사가 어느 한 순간에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자도 아니다. 교육은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게 하고 그에 따라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단계를 거쳐 점입가경의 길을 걷게 하는 데 있다. 교사를 평가한다고 하루아침에 교사의 태도가 달라져 학교에서 새로운 인재가 돌출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학교 현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먼지들이 교실 곳곳에 산재해 있어 교실 환경을 혼탁하게 하듯, 학생들이 교사에게 대하는 불손한 행위들이 각 학년 곳곳에서 일어나 학교 인성 교육에 새로운 불씨로 등장하곤 한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표어 같은 문장은 이제는 케케묵은 장식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지시해도, 불러도, 협조를 구해도 선뜻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한참 생각하였다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곤 한다. 그러기에 정도를 가르치는 선생님과의 사이에서는 신세대 학생들의 행동이 쉽게 용납되기 어렵다. 또 학부모님도 이런 일들을 알고 있는 지, 모르고 있는 지 학생들의 편에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뭄에 콩 나듯, 바른 교육을 외치는 선생님은 불손한 학생이 있으면 즉시 부모님을 학교로 소환시켜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리고 가정교육의 바른 지도를 논의한다. 그러면 어떤 부모님은 자식을 잘못 가르친 부모 탓이라며 사죄하며 더 좋은 지도를 당부한다. 하지만 어떤 학부모는 선생님이 학생을 꾸짖어 뺨을 몇 차례 때렸다고 학교로 달려와 교육청에 알리겠다. 심지어는 더 심하게 하겠다는 등 교사에게
김환희 리포터가 쓴 “선생님, 전형료 환불해 주지 않나요?”기사를 읽고 대수능(대학수능) 전형료에 대해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수시 모집 2차에 합격한 학생들에게도 대수능 전형료를 교육인적자원부가 받게 되는 것은 대수능 원서 접수 마감이 수시 2차가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시 2차에 합격한 학생들도 대수능 원서를 내게 되는 아이러니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실무 착오는 공적으로 보면 행정 착오라고 넘어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사적으로 보면 엄격하게 사교육비를 줄이라고 늘 공문을 일선 학교에 보내면서 오히려 주무부서는 사교육비를 부채질하고 있는 이중성에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수시 모집 2차 합격자 발표는 대학마다 대수능 원서 접수를 하기 전에 발표하든지 아니면 대수능 원서 접수를 2차 수시 모집이 끝나고 하든지 양단간에 선택을 하여야 학부모측에서는 불필요한 사교육비를 지불하지 않게 된다. 동시에 교육인적자원부는 불필요한 종이를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종이는 종이대로 낭비하고, 수시 2차에 합격한 학생은 접수하지 않아도 될 대수능 전형료를 내게 됨으로써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모순된 구조에 희생양이 되고 있다. 또 수능 시험에 응시하여 높
해마다 통과의례인 양 치르는 대학(교) 수시모집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아직도 수능 시험을 치르려고 하면 한 달 정도는 남아 있는데 대학에 합격했다고 자랑을 하면서 수업을 도외시하고 이리저리 교정을 누비고 있다면 교육정책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적이 우수해서 합격한 학생이라면 모르겠지만 성적이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학생이 합격을 했다고 아우성치는 대학 수시모집에는 문제점이 있는 듯하다. 성적이 부진해서 더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학생을 미리 합격시켜 버렸으니 그렇지 않아도 학업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학생을 더욱 교실로부터 외면하게 만드는 꼴이 되어 버렸다. 대학 수시모집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 3년을 마쳤기에 대학 수능 고사를 굳이 치르지 않더라도 각 대학에서 그 학생의 능력을 인정하여 소정의 과정을 테스트 하여 합격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각 대학에서는 입학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성적도 고려하지 않고 학생들을 끌어들여 합격시켜 오히려 더 배워야 할 학생들에게 학업을 중단시키는 역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학생지도와 인성교육에 허점을 드러내고 있어 학생의 탈선마저
평소 학교에서 요즘 학생들의 행동이 왜 이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건너편 산야에서 자라는 초목들은 순수하게 자라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질서를 어기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만물의 연장이라고 일컫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범인들의 삶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2005년 10월 14일 인터넷 모 사이트에 "길거리서 흡연 고교생 잘 때려줬다" 라는 기사를 보고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흘러 나왔다. 7차 교육과정으로 접어들면서 학교의 개방화가 자율화되면서 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참여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에 따라 학교 운영위원회가 학교마다 만들어지고 활동 또한 학교의 교육과정을 심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학교 학부모 모임, 식당 모니터링, 도서관 학부모 봉사활동, 학부모 컴퓨터반 운영, 각 학년 어머니회 등 그 조직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학교와 관리자 간의 시각차로 인해 마찰을 빚는 일도 있었던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학교에서 학부모 간부를 맡고 있는 자녀분은 혹 자신의 자녀가 잘못하면 그것에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
공공기관의 전입금이란 공기업이 해당 자치단체에서 지원을 받는 금액으로, 공기업이 이전을 하게 되면 지자체에 국가의 재원을 지원을 받기 때문에 해당 금액 중에서 일부를 전입금으로 공기업에 지원하여서 해당 지자체에 정착을 가능하도록 비용을 분담하여서 지역개발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학교의 전입금이란 무엇인가? 학교가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공기업도 아니요, 그렇다고 학교의 지자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닌 현실에서 지자치단체부터 학교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필요에 따라 돈을 지원해 주는 형태가 현 학교 전입금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학교가 최근 처하고 있는 실정은 학부모로부터, 학생으로부터, 사회단체로부터 각종 개혁의 목소리에 신음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학교에 지원해 주는 예산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각 학교에서는 학교 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또는 보충수업에 에어컨 비용이다, 난방비다 하여 거두어 학부모의 여론을 학생들의 고충을 메워 가고 있었던 것이 예전에는 있었던 것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작 학교 상급기관에서는 학교발전기금을 거두지 못한다, 보충수업 일정 시간 이상 하지 못한다는 명목이 학
며칠 전 인천시 모 학교에서 일어난 악상은 그 파급효과가 천붕(天崩)을 방불케 했다. 순상(順喪)을 당해도 그 슬픔이 가슴을 메이게 하는 것인데, 변상(變喪)을 당한 학교의 교사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교단을 지켜가는 교사들의 마음은 제자가 잘 되는 데 만족을 느끼고, 부모는 자식이 잘 데는 데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고, 학생은 성취에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순간 자신의 비애를, 쾌락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떠나간 학생들의 마음은 오죽했겠느냐마는 간 자의 뒤에 남아 고통당하는 이를 조금이나마 생각했다면 부모가 고이고이 길러 온 소중한 목숨을 한 순간에 버릴 수 있었을까? 최근 학생들의 자살 소동이 인터넷 사이트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경찰은 경찰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학생들의 비합리적인 사이트에 접하지 말 것을 홍보하고 계도하는 데 한바탕 홍역을 치룬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또 다시 학생들의 자살 소동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자살한 자의 80%가 우울증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는 가정의 비화나 성적의 비화로 인해 한 순간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로 인해 간 자는 말이 없지
모 시골 고등학교 축제 “마리마당”을 보고서, 향토적 서정미를 풍겨내는 순수하고 소박한 내음이 나는 정도에 그치겠지 하는 이념의 이미지가 이번 축제로 인해 나의 생각을 바꾸게 했다. 축제란 각 고등학교에 있기 마련이지만, 이 기간 동안은 제각기 갈고 닦은 소질을 선보이는 마당이 되기에 개인전, 단체전 그리고 각종 동아리들의 전시회 및 장기자랑은 그 학교의 학습의 내면을 겉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대학 축제의 축소판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 학교에서 선보이는 다양한 현장 응용 학습은 성적으로 매겨지는 학습점수가 아닌 개개인의 끼를 보이는 면이라는 점에서는 축제의 찬미라 아니할 수 없다. 시내와는 거리가 있는 강화군 학생들은 시내 학생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유흥 문화 광고를 흉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흥을 돋우기 위해 펼쳐낸 품평회는 그들 끼를 살리는 데 시내 학교 학생들 못지 않았다. 피아노의 끼를 살려서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 학생의 피아노 연주며, 붓글씨 끼로 대학에 가겠다고 선을 보인 학생의 글 향기, 코미디 계통에 끼를 살려 축제를 웃음 바다로 만든 웃자사 등등의 출현은 축제 분위기를
며칠 전에 “행정실장, 장학 전문직으로”라는 글을 발표한 적인 있다. 이 글에 대한 사견으로 어느 모 학교의 행정실장의 글을 읽고 보니 행정실장이 마치 학교의 역할에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필자는 모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행정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행정실에 대한 뿌리까지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학교 행정은 애초에 학교 교사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1960년대 쯤 된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교사들의 손을 떠나 일반행정 요원들의 손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교 행정의 그 뿌리는 애초에 일반직으로 넘겨 학교와 행정의 이원화를 만들려고 한 의도가 아니었다. 만약 학교 행정이 교장과 교사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학교 행정을 교사에게 맡겼는가? 또 경찰직에 경찰 행정을 일반직이 담당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헌법상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인 삼권분립이란 큰 테두리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구조적인 원리에 있는 것이지 작은 틀에서 나타나는 조직구조는 큰 구조의 하부구조로 상급 기관의 업무를 잘 이행하는 차원에서 배열된 것에 지나지 않고 또 학교 행정 구조는 행정직이 견제와
2005년 9월 16일 모 일간지에 2005학년도 서울대에 합격한 각 고등학교 학생수가 발표되었다. 그 많고 많은 고등학교 가운데 10명 이상을 서울대에 입학시킨 학교는 59개 안팎이었다. 그 중에 서울에 소재해 있는 고등학교가 대부분이었다.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는 고작 10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고등학교에서 서울대에 진학시키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 할지라도 지방에 소재한 고등학교에서는 서울대에 입학시키는 것이 꿈같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명을 입학시킨 고등학교가 전국의 고등학교 중에 너무 많다는 것은 서울대에 입학시키는 확률이 많이 보편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시골에서 서울대에 간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방에 소재한 고등학교 중에서 농어촌 전형의 특혜와 지역할당제 등으로 인하여 서울대 입학 문턱이 꽤나 완화된 것은 사실이다. 서울대에 한 명이라도 입학시킨 고등학교의 수가 가면 갈수록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나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수준이 가면 갈수록 저하되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 일이다. 서울대에 한정된 사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낮아진다는 것은 본고사가 있을 때보다 일선
인천의 상징물 중의 하나인 자유공원. 요즈음 그곳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전경대원들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상징물이요, 한국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맥아더의 동상은 인천의 중심가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시련을 당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차이나타운과 월미도도 내려다 볼 수 있고, 봄이면 꽃이 피어 좋고, 여름이면 지대가 높아 시원해서 좋고, 가을이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고, 겨울이면 황량한 공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과거의 회상의 공간을 제공하해서 좋다. 그러나 최근 맥아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해병대 군인들과 군용차량이 공원에 진을 치고 맥아더 동상을 지켜가고 있어 공원을 찾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어느 때나 가도 그곳은 맥아더를 보러 간다는 느낌보다는 공원이기에 간다는 이미지가 훨씬 더 뇌리를 스치곤 했다. 게다가 꼬맹이와 같이 갈 때면 역사에 대한 과거의 인식을 이야기해 주는 여가를 가질 수 있어서도 좋다. 맥아더가 한국 전쟁에 우방국으로서 참가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민주주의 국가를 공산주의 국가로 가는데 막아주는 역할을 한 일등공신
며칠 전 학교시험문제도 저작권 인정한다는 보도는 현재 학교 교사에게는 큰 기쁨인 동시에 경고성 있는 의도를 담고 있다. 지금까지 각 학교에서 교사들은 문제집에 있는 문항을 약간 변형시키거나 그대로 출제해 학생을 평가하는 데만 사용한 것이 보편화된 사실이다. 허나 그것조차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저작권이란 그 한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는 법규에 규정돼 있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교사는 학생들의 평가에만 쓰기 위해 모 문제집의 좋은 문항을 일부 표절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학원으로 새어가 학생들에게 판매될 경우 교사의 징계는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학교와 학원 그리고 대학, 이 삼각관계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가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가 안고 있는 과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오랫동안 공부를 시키면 학원에서는 학생의 건강, 교사의 무성의 감독, 학문의 자율권 문제 등등을 들고 나와 학교에 압박을 가하고, 또 학원으로 학생들이 몰려가면 학생들의 불법타락, 학원의 상업화로 지나친 사교육비 지출 문제, 음성과외 등으로 여론이 끊고, 대학수능시험이 어려우면 학원으로 학생을 몰아낼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