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양

<사자성어로 교육읽기> 환서일치(還書一癡)

지난 해 어느 봄날. 창밖을 내다보다고 서 있다가 선현들의 마지막 날 장면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책상에는 ‘퇴계집’이 펼쳐져 있었다. 이황(1501-1570) 선생의 문집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알고자 할 때, 연보처럼 편리한 자료도 없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엮어서 처음부터 읽을 것도 없다. 선생의 생애 마지막 해인 경오년. 임종 전후의 기사를 보다가 눈길이 멈춘 곳은 서거 5일 전의 기사다.

‘12월 3일. 자제에게 남의 도서는 목록을 작성하여 돌려주라 지시하셨다(命子弟 錄還他人書籍).’

이 기사의 다음에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조선 최고의 학자가 70세에, 그것도 임종을 눈앞에 둔 날에, ‘빌려온 책들은 빠뜨리지 말고 잘 돌려주라’는 당연한 말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옛말에 ‘책을 빌려주는 이도 바보, 빌린 책을 돌려주는 이도 바보(借書一癡, 還書一癡)’라는 말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떠돌던 때가 있었다. 책을 가진 이는 이 말을 구실 삼아 빌려주지 않아 책이 필요한 학자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바보 치(癡)자는 술단지를 뜻하는 치(瓻)자와 글자의 모양이 비슷해 와전된 것이다. 한대(漢代)에 책의 소유자와 대여자 간의 묵계로 ‘책을 빌려 갈 때 술 한 단지, 책을 돌려 줄 때 술 한 단지를 가져간다’는 의미의 ‘차서일치, 환서일치(借書一瓻, 還書一瓻)’라는 말에서 한 글자가 잘못 옮겨지면서 빌린 책을 돌려주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는 서적 출판 량이 적고 지금처럼 서점에서 사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새로 책이 수입되거나 출판되면 특정 지위에 있는 일부만 반사(頒賜)나 구입 등의 방법으로 구할 수 있었고, 거개는 빌려보거나 필사해 사용했다. 당시 책의 소유는 바로 신분의 상징이었고, 또 값나가는 재산이었다. 이토록 소중한 책을 빌려간 후 돌려주지 않고 타계하면 원망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선생이 임종을 앞두고 갑자기 이 같은 유언을 했고 연보를 엮은 문인도 이 말의 중요성을 잘 깨닫고 연보에 올린 것이다. 이 말은 문인인 서애(西厓)선생을 비롯한 그 후학과 다른 계열의 학자들에게 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빌려 온 책의 반납을 지시하는 것이 유언의 한 패턴이 돼 연보에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평범하고도 당연한 한마디 말이, 나쁜 풍속을 교정하는 양약이 된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시대나 사표(師表)가 되는 지도자의 모범적인 행동은 이풍역속(移風易俗)의 힘을 갖는다. 퇴계선생의 유언을 통해 그분의 높은 인격과 그 인격이 사회에 남긴 영향을 새삼 곱씹게 하는 봄날이다.
배너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