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여년의 교직생활 속에서 나도 모르게 교육자 특유의 이미지가 온몸에 체화되어서 그러는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굳이 이쪽의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저쪽에서 먼저 내게 “학교에 계시죠?” 아니면 “선생님이시죠?”하고 물어올 때면,직업이 곧 그 사람이고, 사람의 한 생애 어디서 무슨 밥을 먹고 사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중차대한 문제라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학교에 있다는 것이 개인적 일처리를 하는데 불편할 때가 있어 때로 선생님 아닌 척을 해보려 해도 오랜 교직생활에서 굳어진 말투, 제스처, 차림새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흔히 ‘선생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서 왠지 깐깐하고,답답할 정도로 우직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 역시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불의 앞에서 눈 딱 감고대충 대충 살았더라면,나중에 탄로 나고 말지언정 남들 앞에서 배짱과 호기 부리며 대충 대충살았더라면, 개인의 명철보신 위해서 간과 쓸개 하나쯤 빼놓고 살 줄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사회적 성취와 경제적 부를 축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그리 살아서는 단 한순간도 양심의 채찍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 여린 한 사람의 교육자인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는 쓸 데 없는 질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교육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내는 일이며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간을 바람직하게 성장․변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실상, 학교 현장을 들여다볼라치면 이러한 본질은 온 데 간 데 없고 사이비 교육만이 판을 치고 있다. 백년하청, 조금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입시중심의 교육체제 하나만 놓고 생각해 보자. 세속적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것이야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기에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지만, 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 현재와 미래가 오로지 대학 들어가는 성적 하나로 좌우되고 명문대 졸업 여부 하나로 결판나고 마는, 세계에 그 유래가 없는 대한민국만의 병리적 사회풍토 속에서 학교가 단순한 입시교육기관으로 전락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안타까운 것은 입시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교육수요자들의 맹목적 의존으로 인해 급속히 팽창하는 사교육시장의 위세에 밀린 나머지 본래적 기능의 하나였던 지식전수기능마저도 불신을 받기에 이른 학교가 이제는 단순히 학생들의
이번 3월에 학교를 새로 옮겼다. 광주의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80년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다가 외지고도 또 외진 변두리, 그것도 신설 중학교로 전보발령을 받은 것이다. 인사와 관련하여 말하기로 들면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냥 묵묵히 주어진 자리에 가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 속 다짐도 잠시뿐, 나의 전보소식을 접한주위 사람들의 눈빛과 반응이 참으로 다양하고 기막히기까지 하여 어쩔 때는 속이 상하고 어쩔 때는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영전을 축하한다는 사람,벌써 교장으로 승진해서 갔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경우는, 인사 당사자의 속도 모르고 던지는 겉치레인사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돼버렸습니까?", "혹시 무슨 잘못을 저질러 좌천이라도 당하신 것 아닌가요?" 하며 범죄인 심리수사라도 벌이는 것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경우는,걸려온 전화를 당장 끊어버리고 싶고 마주보고 있는 얼굴을 빨리 피하고 싶어진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직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학교를 옮겨 본다는 것이 그렇게 됐습니다." “좌천은 무슨 좌천이요.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이런 저런해명도 해보
십여 년 전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선배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특별히 무슨 용건이 있냐고 묻었다. "전 교감, 나 내년에 학교를 옮겨야 하는데 자네 학교에 근속만기로 이동해 가는 사람이 있어 자리가 하나가 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서 저희 학교에 오신다면 대환영이지요." "근데~. 나 부탁이 하나 있어. 이젠 나이를 먹다 보니 힘든 일은 못하겠더라구. 담임이나 부장 역할 맡지 않고 수업이나 조금 할 수 있게 배려해 주게." 기분이 좋다 말고 금세 떨떠름해지기 시작했다. 선배님이니까 가급적이면 개인적 형편도 고려해주고 나이도 드신 만큼 학교 이동에 따른 불편함 없도록 도와주어야겠지만 아직 인사이동되기도 전에 젊은 후배 교감한테 부탁한다는 것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선배님. 그건 좀....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 담임을 안하려는 통에 학년초만 되면 골머리를 앓는 것이 요즘 학교 실정인데 새로 오신 분들마저 어려운 일은 안 할 속셈으로 오시면 학교로서 정말 괴롭습니다." "아, 전 교감. 나는 그냥 서로 아는 처지고 그래서 부탁한 것인데....안 된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우리 곁에서 전화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심심할까? 아니 어쩌면 심심하다 못해 권태로워 죽지나 않을까? 수업이 없는 쉬는 시간이다 싶으면 숫제 전화통을 붙들고 산다고 해야 할 우리학교 젊디젊은 김 선생. 아침저녁으로 얼굴 맞대고 사는 부부간에 무어 그리 할말이 많기도 한지,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틈만 나면 이쪽에서 걸고, 조금 뜸하다 싶으면 어느 새 저쪽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부부교사로, 두 학교 교직원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잉꼬부부로 소문난 사이라지만 너무 금슬 좋고 죽이 척척 잘 맞다보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시샘조차 생길 때가 있으며, 성격이 본래 무심한데다 붙임성 없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가도 아내한테 전화 한 통 할 줄 모르고 살아온 나로서는, 젊은 사람들이 부부간에 알콩달콩 잘하고 사는 모습 보다보면, 마누라에게 너무 잘못하는 것 같은 생각에 은근히 찔리는 구석도 없지 않다. 남의 부부끼리 주고받는 사적인 전화 내용을 일부러 훔쳐 듣는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에서 서로 마주 보이는 지척의 거리에 위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김 선생의 통화 내용인 즉, 그날그날의 직장생활에서의 고충에 대한 위로 안부를
사회생활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다.’는 말이 ‘자기 주견 없이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그 의미가 부정적이어서 경계해야 할 처세방식이라 할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남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함께 하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인격적 배려와 존중을 기울이는 노력’의 하나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긍정적 의미 또한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에 계시는 우리 선생님들은 과연 누구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눈치를 살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권위를 앞세우는 교장도 아니며, 치맛바람 앞세우는 학부모는 더욱 아닐 것이며 바로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라 할 수 있다. 말똥말똥 눈을 반짝이며 사랑과 배움의 열망에 사로잡힌 아이들 하나하나, 그 존재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그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깊이 헤아리면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대해 주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전제라고 할 수 있으며 교사의 마땅한 책무이기도 하다. 신체적, 정신적 성장을 하루가 다르게 거듭하는 아이들을 한없이 미숙한 철부지들로만 치부한 나머지 ‘저 어린 것들이
이 나라 초․중등 교육은 대학이 망치고, 대학 중에서는 서울대학이 다 망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2008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논술 반영비율을 현행 10%에서 30%로 늘리고 대상도 인문계열 뿐만 아니라 자연계열까지 확대실시 하겠다는 서울대의 발표가 나오자마 이를 기다렸다는 듯 다른 주요 대학들까지도 덩달아 논술고사 확대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이제 대학별 논술시험은 사실상의 본고사로 굳어진 상태이고, 수능 성적이나 내신 성적이 그 나름의 변별요소가 된다고는 하지만 논술이 당락의 최대변수가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 교육제도나 입시요강이 어떻게 바뀌든지 간에 그저 ‘대한민국에 사는 게 죄’라고 생각하며 자녀 교육의 온갖 애로와 고충을 고스란히 감내해온 우리의 불쌍한 학부모들은 그렇잖아도 사교육비 부담이 무겁기만 한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유명논술학원과 족집게 강사를 찾아 나서야만 하기에 휘청한 허리가 더 휠 게 분명하며,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집어넣어야 하는 일선 고등학교들은 내신 관리에 수능시험 대비하는 것만도 버거워 인성교육은 해볼 엄두도 못내는 차에 이미 바닥나 버린 학교 교육력의 일부를 어떤 식으로든 쥐어짜내어 논술
그 땐 왜 그랬을까? 학급당 학생수 5,60명에 개인별 주당 수업시간이 보통 스물 일곱 여덟 시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수업하느라 쉴 틈조차 없는데도 옆자리 동료가 몸이 아파 못 나오거나, 부득이한 출장으로 빈자리가 생기면 그 수업 서로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나서던 때가 있었으니…. 도대체 뭐가 좋아서 제 몸 피곤함도 잊고서 제 수업도 버거운데 남의 수업까지 하려 했을까? 아마 모두 미쳤었나 보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어서 미치고,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서 미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자기 반 아이들 일로 급한 전화벨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가고, 결석이 잦은 아이가 하나라도 있을라치면 수업을 마치자마자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진 동네, 흙먼지 뒤집어쓰면서도 몇 십리 길 멀다 않고 걸어가서 아이를 만나 토닥토닥 등이라도 두드려 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선생 노릇 다 못한 것 같아 늘 마음 한쪽이 무겁기만 했던 그 시절.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런 고생쯤이야 모른 척 했어도 월급은 나왔을 것이고, 세상은 빙글빙글 잘 돌아갔을 터인데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아이들에, 가르치는 일에 몸과 마음 모두를 바치게 만들었을까? 상전벽해
조금은 과장된 표현일지 몰라도, 학교에서 교장이 '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였던 왕이 누리는 절대 권력에 일개 학교 교장 자리를 견줄 수야 없지만, 학교라는 특수 집단 속에서 교장 자리는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큼 힘을 가진 자리였고 그에 따라 교장 개인이 누리는 위세 또한 막강했던 것이다. 그래 그 시절, 교장이 갖고 있는 막강한 힘 앞에서 쩔쩔매는 교사들의 움츠러든 모습을 떠 올리노라면,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왕 앞에서 잘 보이거나 살아남으려 머리 조아리는 신하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교장 자리가 그렇게 대단하다 보니, 뜻 가진 사람이라면 너도나도 교장 한번 해 볼 욕심에 아이들 가르치는 본업보다는 승진에 필요한 점수 따기에 혈안 되기 일쑤였다. 상전벽해라 했던가. 세상이 좋아지고 또 좋아져서 한 나라의 대통령도 자신이 가진 권력에 상응한 힘의 사용에서 한계를 느낄 정도로 백성들의 힘이 커진 나머지 옛날처럼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으니까, "못해먹겠다"고 투정하는 판이 되다보니 학교인들 별 수 있겠는가. 교장 노릇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권위의 추락을 맛볼 수밖에. 일례로, 도덕적 권위나 전문적 지식 없이 구시
요즘 같은 권위 상실의 시대에 일선 학교 교감 자리가 무슨 큰 힘이 있을까. 하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책무와 권한의 범위 안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학교 현장에 만연해 있는 구태와 비교육적 요소들을 조금씩이라도 바로잡음으로써, 죽어 가는 우리 교육을 다시 살리는 일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부임한 지 어느 새 2년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잘해보겠다고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처음에는 몸이 지치는가 싶더니 생각이 다른 사람들, 그 다양한 이해의 틈바구니를 헤쳐 오다 보니 이젠 마음까지 지치고 말았다. “내가 무슨 ‘통뼈’라고, 혼자서 이 나라 교육의 십자가란 십자가 다 메고 가는 듯, 속 타며 애간장을 태울 필요가 뭐 있는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나머지 교육자로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책임과 의욕의 끈마저 다 놓아버리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다. 학교에서 관리자가 나름의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학생과 학교 발전을 위해 무엇을 좀 해보고자 할 때, 선생님들 모두가 학교 구성원으로서의 공동의 책임을 느끼며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일이 잘되는 쪽으로 도와주면 얼마나 좋
갈수록 세상은 좋아진다는데, 사람 사는 일은 왜 이리도 항상 바쁘고 어수선한지…. 학기말 업무에 쫒기다 보니 여름 방학 들어가면서 여러 선생님들께, 한 학기 동안 정말로 고생 많으셨다며 방학 잘 보내시라는 개인적 인사조차 차분히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못내 서운하다. 선생님들이야 연수원 내놓고 학교에 안 나와도 되고, 보충수업을 위해 나오시는 분들도 그날그날 소정의 수업만 끝내면 자유롭게 자기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학이지만, 관리자인 교장이나 교감은 매일매일 학교를 책임지고 있어야 하기에 오히려 방학이 부담스럽기조차 하다. 그래 오후 늦은 시간, 학생들마저 모두 하교하고 없는 적막강산 같은 교정을 한바퀴 돌고나서 텅 빈 교무실에 혼자 앉아있노라면 그간의 교육활동, 학교경영 전반의 잘잘못이 되돌아봐지게 되는 가운데 교단생활의 애환과 관련한 여러 감회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평상시에는 수업하랴 잡무 보랴, 각자의 일이 바빠서 한 직장에 살면서도 늘 인간적 대화와 소통이 아쉽던 선생님들이기에 이런 방학 때만이라도 한가한 틈을 내어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며 서로의 마음들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저 마음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교
학교가 죽었다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답답함과 울분의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우리 교육이 어쩌다 이런 말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학교가 죽었다면, 생명이 없는 죽은 학교에서 우리 선생님들은 무엇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학교가 정말 죽었는가? 진짜 공부는 학교 아닌 다른 데서 하고 누구 말대로 졸업장 하나 달랑 얻기 위해, 죽은 선생님들과 죽은 아이들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 따먹기 놀이나 하는 곳이 오늘의 학교란 말인가. 공교육 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제대로 된 사람 만들기로서의 인간교육, 미래 사회를 선도할 인재양성으로서의 지식교육 두 가지 측면에서 국민적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국가발전과 개개인의 성장에 끼친 그 나름의 역할과 기여 또한 적지 않음에도, 일부에서 특히 언론에서 우리 교육현실의 어두운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하여 학교 무용론을 들먹이는가 하면, 학교 조직을 개혁과 변화에 대한 최후의 저항집단으로까지 몰아 교육에 대한 불신풍조를 조장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움을 넘어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교무실에 전화벨이 울린다. 한 번 울리고 두 번 울리고 아니 아홉 번 열 번을 울려도 받는 사람이 없다. ‘받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받는 사람’이 없다. 누구의 귀에도 벨소리가 들리질 않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큼지막한 이어폰을 귀마개처럼 꽂고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저마다 인터넷에 몰입해 있으니 무슨 소리가 들리겠는가. 그래, 그렇잖아도 할 일 많은 학교 교감은 정보화시대를 맞아 본연의 임무 말고 한 가지 일이 더 늘고 말았다. 전화 당번 노릇이 그것이다. 인터넷의 발달,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빠름과 편함, 유용함에 우리 모두가 탄복하고 있지 않은가. 정보의 바다를 열심히 뒤져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 자료를 검색하는데 바쁜 선생님들의 노고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것이며, 순간순간의 뉴스를 신속하게 검색해 보는 것도 가르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터이다. 머리도 식힐 겸 수업이 없는 시간에 사이버 바둑을 둘 수도 있을 것이고, 지그시 눈을 감고 컴퓨터 음악을 감상하는 동안 하루 동안의 피로가 풀려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학교는 선생님들에게 더 편하게 컴퓨터를 활용하고 즐
언제는 우리 곁에 ‘스승’이 있어서 '스승의 날' 이었더냐고 묻는다면 입이 열개라도 할말 없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스승의 날'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그 시기를 5월에서 학년말로 옮기고 명칭도 '교사의 날'로 바꾸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왠지 뒷맛이 씁쓰레하다. 누구의 머리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뒤틀릴 대로 뒤틀린 교육현실과 선생님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은 그대로 두고 기념일의 시기만을 옮긴다 해서 모두가 걱정하고 우려하는 스승의 날과 관련된 제반 논란들이 사라져 줄 것인지는 의문이다. 없어도 될 것이 굳이 있어서 문제라면 차제에 아예 폐지해 버리면 간단할 것이고, 없애기 민망하여 그냥 둘 양이면 이름이라도 그대로 사용할 일이지 ‘교사의 날’로 개명하려는 까닭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어찌 생각하면 이리 부르나 저리 부르나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기는 마찬가지여서 하등의 시빗거리도 될 수 없을 성싶지만, 특정 어휘 속에 내포된 언어사회적 맥락과 뉘앙스를 따져볼 양이면 스승과 교사는 결코 같을 수 없을 터. 전자에게서 무언의 소명의식과 자기헌신, 교육자적 보람과 긍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후자에게서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지식을 제공해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