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時習之 不亦說好” 논어를 펼치면 바로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논어는 공자님이 직접 저술하신 책이 아니라 후대에 공자의 제자들에 의하여 편집하여 완성된 책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책으로 만들어 갈 때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이 책의 편집의 총 책임을 맡았던 제자는 위 구절을 논어의 첫머리에 배정을 했다. 아주 심오한 책임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보다 근본적인 것-인생과 우주에 관한 것-철학적인 구절이 나올 법도 한데, ‘공부’하는 현장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논어는 시작된다. 제자들에게 기억된 스승 ‘공자’는 배우는 즐거움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 구절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해석으로 끝나버리기에는 무언가 깊은 교육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공부에 대한 즐거움의 경험 없이는 학문의 세계에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 학문의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지식기반 사회가 도래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히려 정말 필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한다. 알아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없이는 글로벌 시대의 인재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공적인 학습 활동의 원칙 세 가지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세 가지란 ‘學(배움)’ ‘習(익힘)’ ‘說’(기쁨)이다. 즉, 선생님과의 수업 시간에 잘 배우고, 배운 내용을 잘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보람이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우리 교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공부를 통한 기쁨의 출발은 배움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잘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자의 가르침으로 공자의 제자들은 평생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 플라톤은 공부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이후로 서양 철학의 근본을 확립했다. 친절한 가르침, 정성을 들인 가르침, 열정적인 가르침,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가르침, 기를 살려 주는 가르침을 통해 학생들은 잘 배우게 되고 선생님의 그 수업을 통해 학문의 즐거움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좋은 가르침이 있을 때 학생들은 그 내용을 익히고 연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고 싶어 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공부에 대한 즐거움과 맛을 알아 가는 것이다. 우리 제자들에게 공부하는 즐거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도 선생님들의 수업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한 사람의 일생을 바꿀 수도 있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올해 말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보내는 카드나 이메일에 이런 인사말이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서 공부가 즐겁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감사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결코 작은 시간이 아니다. 그 수업을 마친 후 취침 시간까지 자신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익힘’의 시간을 가져야 할 그 시간에 학생들은 다시 학원과 과외를 통해 다시 배움의 시간을 갖게 된다. 내것으로 만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사설 교육 기관 선생님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고, 고부에 대한 즐거움의 귀중한 경험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학생들이 학문의 즐거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아직 내것이 되지 않은 채 학원 과외 선생님의 지식을 빌려서 공부를 해 가고 있는 것이 학생들의 현재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학교의 수업 안에서 좋은 배움이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은 방과 후엔 더욱 자율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 학생들은 방과 후에 학교에서 배우는 것 이상의 것을 사설 교육 기관에서 또 배우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학생들은 당연히 배움의 즐거움을 갖는 순간인 자기 스스로 익히는 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