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는 말로서의 언어와 관계로서의 언어가 있다. 관계로서의 언어는 서로 간에 형성된 관계가 은밀히 건네는 언어인 셈이다. 관계로서의 언어, 즉 관계 언어는 겉으로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나 마음의 귀로는 그 어떤 소리보다 생생하게 들린다.
관계 언어가 사랑과 신뢰에 기초하고 있다면 말로서의 언어가 어떤 내용이든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경상도, 특히 부산 지역에 가보면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들이 욕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칠기 그지없다.
‘야이, 가시나야,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런 유의 말들이 일상에서 오고가지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웃음과 미소가 어려 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친밀한 관계 언어가 오고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서의 언어가 아무리 ‘사랑한다, 좋아한다’이더라도 관계 언어는 ‘미워한다, 싫어한다’인 경우가 많고 그 반대인 경우도 허다하다. 교사와 학생 간에도 관계 언어가 잘 형성돼 있으면 말로서의 언어는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말을 함부로 하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교사와 학생 간에 관계 언어가 부정적으로 형성돼 있으면 말 한 마디에도 서로 상처를 받기 십상이다.
어느 여교사가 수업 시간에 두 남학생이 쪽지를 주고받고 킥킥거리며 수업을 방해하자 그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좀 신경질적으로 주의를 줬다.
“너희들 수업 시간에 왜 그리 떠드니? 너희들 그러면 나 너무 힘들어!”
그 다음 순간, 충격적인 말이 한 학생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힘들면 선생 그만 두시든지요.”
여교사는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며 교무실로 달려 내려오고 말았다. 울고 있는 여교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남자 체육교사가 두 학생을 혼냈고 여교사와 그 학생들은 더욱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여교사는 학생에게서 그 한 마디 말을 들은 이후 정말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서로 감정의 앙금을 품은 채 그대로 지내면 안 될 것이다. 말 자체를 가지고 따지기보다 먼저 관계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계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말로서의 언어, 즉 대화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떠드는 이유가 뭐니? 내 수업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니?”
“선생을 그만 두라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 정말이지 그 말 듣고 내가 선생 자격이 없나 보다 하고 학교를 그만 둘 뻔했단다.”
이렇게 마음을 여는 대화를 시도할 때 학생들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관계가 회복되면 그 관계가 늘 친밀한 언어들을 건네고 있으므로 사실 많은 말이 필요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 조성기의 상처받은 당신을 위하여=요즘 어딜 가나 ‘힐링’이 유행이지만 정작 ‘힐링’이 필요한 교사들은 누구에게도 속내를 말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울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해도 교육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상처들을 달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강요된 감정노동은 결국 열정으로 섰던 교단을 등지게까지 한다. 상처받은 교사들에게 조성기 교수가 들려주는 미움과 갈등 극복의 노하우를 연재를 통해 들어본다. 조 교수는 1971년 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라하트하헤렙’으로 제9회 ‘오늘의 작가상’, ‘우리시대의 소설가’로 제1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통도사 가는 길’, ‘내 영혼의 백야’,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