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화와 극우화는 같은 말이 아니다
진보를 표방한 교육감이 또다시 다수 당선됐다. 그런데 정작 그 ‘진보교육’을 받고 자란 10대와 20대에게서는 보수화, 더러 극우적 정서까지 번진다는 진단이 나온다. 동의한다. 다만 ‘보수화’와 ‘극우화’라는 두 단어부터 갈라 보고 싶다. 뭉뚱그리면 진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먼저 질문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진보교육을 받은 세대라면 진보 성향을 띠어야 한다’는 전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시민교육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특정 성향을 심어 주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주입이며, 진보가 주입의 방식으로 전수된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
시민의 정치적 성향은 교육감이 몇 해 재임했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회가 놓인 사회경제적 조건,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해 누가 더 설득력 있는 비전을 내놓고 공감을 얻어내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교육감에게는 애초에 진보의 비중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권한도 능력도 없다. 다만 기대를 꺾는 것은 일정 부분 가능한 것 같다.
어떤 학생이 보수적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면,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작은 정부와 시장, 개인의 책임과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은 진보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품어야 할 가치다. 더구나 그 선택이 구호만 요란했던 진보에 대한 합리적 의문에서 나온 것이라면, 진보 진영의 성찰이 필요한 문제다. 그들은 진짜 진보를 겪고 거부한 게 아니라, 진보라는 이름의 빈 구호만 겪고 등을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는 사상이 아니라 정서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민주시민교육’을 진보의 전유물처럼 칸막이 쳐 두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개인, 법과 절차에 대한 존중, 공동체에 대한 의무, 이것은 보수가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 온 가치이기도 하다. 민주시민교육은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입장을 근거로 세우고 타인과 겨루는 법을 가르치는, 모든 정치적 입장의 토대다. 문제는 보수교육감도 진보교육감도 이 토대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 빈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보수라고도 극우라고도 부르기 애매한 태도다. 사상이라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정서다. ‘페미’라는 한마디로 여성을 마녀사냥하고, 이주노동자를 ‘세금 빼먹는 무임승차자’로 지목하며, 중국인을 향한 조롱을 또래 문화처럼 소비하는 것은 사상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사실을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수고조차 거부한 채 입맛에 맞는 가짜뉴스를 신봉하고 근거를 들이밀수록 음모론으로 도피하는 태도 역시 사상이 아니다. 공통점은 단 하나, 누군가를, 정확히는 아무리 짓밟아도 보복당할 걱정이 없는 사회적 약자를 향해 휘두르는 폭력과 조롱·선동이다.
이것을 ‘보수화’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혼동이다. 보수주의가 본래 표방해 온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책임·절차·검증된 것에 대한 존중이었다. 사실을 따지지 않고 선동에 올라타며 약자를 짓밟는 행태는 그 어떤 보수의 전통과도 무관하다. 이것을 보수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두 번 실수한다. 혐오에는 없는 사상적 무게를 실어주고, 그 뿌리가 가치관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
학교가 비운 자리를 알고리즘이 채웠다
그렇다면 이 ‘극우라 불리는 정서’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그것을 보수·진보 양쪽 교육감 모두의 실패가 남긴 빈자리로 본다. 선거 경쟁에 매달렸고, 교육을 ‘원하는 건 다 해주는’ 서비스로 전락시켰으며, 양쪽 다 끝내 학벌 질서에는 충성했다. 학교가 시민을 길러내야 할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정치적 부족주의(tribalism)와 분노를 연료로 삼는 유튜브 알고리즘이었다. 아이들은 학교가 가르치지 않은 세계관을, 추천 영상의 자동재생 목록에서 배웠다.
그 빈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입시와 평가 구조를 들여다보면 분명해진다. 학생부종합전형은 내신이라는 상대평가 위에 서 있다. 상대평가에서 옆자리 친구는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내 등급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학교가 아무리 공동체와 연대를 가르쳐도, 평가표는 매일 정반대를 가르친다.
고교학점제는 이 압력을 풀어주리라 기대됐지만, 현장에서는 ‘유불리 계산’으로 변질됐다. 배우고 싶은 과목이 아니라 등급 따기 유리한 과목을 고르는 전략 게임의 복잡성만 더해졌다. 이런 곳에서 3년을 보낸 아이에게 학교란 시민을 길러내는 장소가 아니라 각자도생을 훈련시키는 장소다.
경쟁은 교실에서 매일 학습된다
승자와 낙오자, 두 칸짜리 분류만 주어진 채 자란 세대에게 타인은 위협이거나 ‘자격 없는 자’다. 혐오는 그 제로섬 투쟁이 남긴 정서적 잔여물이다. 이제 청년의 ‘보수화’와 진보교육감의 책임은 한 줄로 이어진다. 물론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바꾸는 일은 교육감의 권한 밖이다. 그러나 문제는 권한의 한계가 아니라 말과 정책의 어긋남이다.
그들은 상대평가의 폐해를 누구보다 크게 성토하며 절대평가 전환을 구호로 외쳤다. 그러면서 정작 손에 쥔 정책은 학벌 질서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것이었다. ‘경쟁은 나쁘다’고 말하는 입과, 그래도 ‘내 자식’은 그 경쟁에서 앞세워 주겠다고 약속하는 손이 한 몸에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각자도생을 배우는 동안, 구조를 바꾸겠다던 어른들은 그 구조에 가장 충실한 관리자였다.
양쪽 모두의 책임이지만, 적어도 ‘진보’를 자임한 쪽에는 더 무거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진보교육감을 겪은 지도 오래다. 그러나 그 실천을 들여다보면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온갖 이익단체의 지지 선언을 받는 대가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공약을 내걸고, 정작 도움이 절실한 사회적 약자와 위기 학생 앞에서는 재정과 행정력을 투자하는 데 인색했다. 반면 성과로 내세울 치적성 사업에는 막대한 예산이 흘러갔다. 입으로는 입시경쟁 철폐와 학생 인권을 외쳤지만, 손에 쥔 정책은 결국 그 경쟁의 앞줄에 우리 아이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진보교육은 무엇을 바꾸지 못했나
진보란 본래 한정된 재정과 행정력의 우선순위를 약자 쪽으로 옮기고, 그 이동을 시민에게 설득해 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우선순위의 재배치가 아니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교육의 서비스화였다.
예산을 더 쓰고, 사업을 더 벌이고, 정부와 교육청의 이름으로 현금을 더 풀면 그것이 진보인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방만한 지출을 이끈 1등 공신이 다름 아닌 교육감들이었음에도, 정작 그 교부금의 규모를 손보자는 논의가 나오자 시도교육감협의회의 이름으로 일제히 반대 성명이 터져 나온다.
우선순위를 묻는 질문 앞에서는 침묵하다가, 재원의 총량이 흔들릴 때만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약자를 위한 자원의 재배치에는 인색하면서 자기 곳간을 지키는 데는 일사불란한 이 모습을, 과연 진보라 부를 수 있는가. 교육부와 각 시도교육청은 매일 10·20세대에게 모순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진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진보교육의 실패가 있다면, 가치를 충분히 선언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가치를 매일 무력화하는 경쟁 구조에는 끝내 손대지 못한 채, 혹은 손대지 않은 채 선언만 반복한 데 있다.
청년들을 ‘보수가 된 아이들’로 명명하는 일도, 예산의 크기를 진보의 크기로 착각하는 일도 이제 멈출 때다. 청년에게서 본 그 얼굴은, 우리가 매일 그들 앞에서 지어 보인 표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