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라이프

전학생의 반장 선거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불리지만, 내가 처음 다녔던 학교는 국민학교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입학식을 하러 갔던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나는 남학생 여학생 통틀어 우리 반에서 키가 가장 큰 아이였다. 학부모들은 운동장 뒤쪽에 와글와글 모여 있었고, 키 순서대로 맨 뒤에 서 있던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낙서를 하거나 옆에 있는 친구와 장난을 치거나 뒤를 돌아보면서 제 어머니를 찾아 울먹이는 아이들이 좀 모자라고 우습게 보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년생인 바로 위 언니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 위로도 언니가 둘이나 더 있었다. 학교라는 곳이 어떤 곳이고, 선생님이란 어떤 존재이며, 학교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언니들이 선생님이 되고 나는 하나뿐인 학생이 되어야 하는 ‘학교 놀이’를 통해, 한글도 떼고 덧셈 뺄셈도 웬만큼 배웠다. 나에게 학교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곳이었다.


키 큰 미운 오리 새끼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에 대한 나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70년대 초,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힘입어 그 무렵 봉제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급격하게 번창했다. 그 덕분에 나는 꽤 비싼 수업료를 내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처음 그 학교 교실로 쭈뼛거리며 들어갔을 때 문화적 충격을 잊지 못한다. 교실 바닥이 윤기 나는 돌로 된 현대식 건물과 반질반질한 책상들도 놀라웠지만, 아이들이 죄다 하얀 티셔츠에 짙은 감색 교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고동색 점퍼에 남색 체크무늬 바지를 입고 있던 나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금테 안경을 낀 무뚝뚝해 보이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전학생인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교복을 입을지 말지를 학생 스스로 결정하도록 교칙이 바뀌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홀로 교복을 입지 않은 내가 당황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나름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식이 더 나은 교육을 받기를 바라며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학을 보냈던 나의 어머니는, 굳이 입지 않아도 되는 교복까지 사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서너 달 동안 그 교실에서 교복을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학생으로 지내야 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교복을 입지 않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나도 낯선 학교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반장 선거의 씁쓸한 기억
여름 방학이 끝난 뒤 2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지나고 나서 반장 선거를 했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반장으로 적당한 사람을 후보로 추천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손을 들고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를 추천했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말하면, 그 보답이라도 하듯, 자기를 추천한 사람을 다시 추천하는 일도 벌어졌다. 나도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여자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주의를 끌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가 다시 나를 추천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설레고 기뻤다. 예닐곱 명의 후보 이름을 칠판에 적은 뒤, 선생님이 투표용지를 나눠 주었다. 하얗고 네모난 쪽지에 그 아이의 이름을 적었다. 그 아이도 내 이름을 적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흐뭇했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칠판에 쓰인 이름들 옆에 바를 정(正)자가 천천히 완성되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며 내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후보가 많아서 표가 많이 몰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남자아이가 반장이 되었다. 내가 추천했던 여자애가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내 이름 옆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나를 찍지 않았고 나를 추천한 그 아이도 나를 찍지 않았으므로 나는 0표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고, 천근만근 무거워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조용하고도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아까 우리 반을 위해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지? 자기가 추천한 사람을 찍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추천하지 말았어야지. 반장을 뽑는 일은 장난이 아니고, 자기가 누구랑 친한지 자랑하고 보여주는 일도 아니란 말이다.” 

배너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