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과거의 삶이 있다. 과거의 삶은 과거로 남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삶의 원천이다. 특히 작가에게 과거의 삶은 개인의 성장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문학의 산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대가가 성장기 체험을 고백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유준이 겪는 젊은 날의 방황은 실제 작가 자신의 청춘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소설에서처럼 황석영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일용직 노동자와 선원으로서 생활을 했다. 유준이 고등학교 때 문단에 등단하는 것처럼 황석영 자신도 10대에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삶에는 실망과 환멸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네가 다른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p. 283. ‘작가의 말’에서)
작가의 고백처럼 당시의 삶은 훼손된 세계의 기억이다. 존재론적 고독과 불안이 응축된 날들이었다. 획일주의와 인습이 지배하는 세계와 균열이 심해지는 삶은 실망과 환멸뿐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슬픈 선택을 했던 젊은 날의 기록은 아름답게 남아 있다.
이 소설은 ‘나’의 고백이다. 전체적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준이다. 유준은 1인칭 화자로 소설의 물줄기를 이끄는 인물이다. 준이의 친구 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는 각기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인물들은 동시대에 살면서도 제각기의 고민을 하고 있고, 삶의 방식도 다르게 전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낭만적인 삶에 목말라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유준은 인호와 무전여행을 한다. 어른들은 그것을 ‘길갓으루’(p. 145) 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세상 구경’(p. 144)이다. 기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소설 속의 준이를 비롯한 친구들은 부모와의 갈등, 대학 입시에서 실패하고 과 선택에서도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그 당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관습과 제도에 순응하지 못하고, 일탈을 꿈꾸고 있다.
인호는 ‘나무나 키우고 살(p. 163)’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꿈을 잃지 않고 내일을 향해 가슴을 펼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거친 세상에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모험과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소 버거워 보이지만 그들은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방황은 방황이 아니라 나를 찾는 과정이다.
너 준이 가끔 만나니?
응, 몇 번……근데 걔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 같아.
그게 누군데?
몰라……아마 자기 자신이 아닐까?(p. 213)
유준은 정신이 팔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정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도 아니다. 그 정신의 팔림 중심에는 ‘나 자신’이다. 항상 자기 자신으로 열려있는 유준의 삶은 당시 젊은이면 겪어야 했던 성장 통이다.
이 소설은 결핍의 세계에서도 현실의 슬픔조차도 자기 정화의 기쁨으로 만드는 젊음이 있어 아름답다. 지금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로 떠 있는 개밥바라기’이지만, 열심히 하루하루 살다보면 그 인생도 ‘언젠가는 잘 나가는 샛별(p. 270)’이 될 것이라는 것처럼, 인생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삶에 대한 열정은 뜨겁다.
방황의 끝에 우리가 꿈꾸는 것은 초월이다. 초월의 세계가 ‘개밥바라기별’이다.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랑을 은유하는 매개물인 동시에 60년대 젊은이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표상하는 상징적 메타포이다.
마샬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에서 활자 문화의 종말과 영상 매체 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이후 현대 사회는 더욱 진화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영상 매체 기술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나 영화 감상이 가능하다. 영상 매체에 매료되어 사람들은 책을 멀리하고 문학은 위태롭다 못해 구시대의 가벼운 유물로 전락할 처지에 있다.
이러한 다매체 시대에도 우리 곁에 황석영이 있다는 사실은 든든하다. 황석영은 ‘객지’를 썼고, ‘장길산’을 쓴 대가이다. 그의 소설은 출간되는 순간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 해외 각국에 번역되어 독자의 폭도 넓다. 나는 작가 황석영을 좋아한다. ‘장길산’을 읽었을 때도 작년에 ‘바리데기’를 읽었을 때도 그의 작품이 나오면 서점에 제일 먼저 갔다. 그의 활자는 관념적이지 않다. 가슴에 남아서 감동의 그물을 만들고 삶에 희망의 메시지로 열린다. 그의 삶이 진보적이었던 것처럼 그의 문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이 시대 대중들에게 울림을 주는 마력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의 글쓰기는 항상 독자를 위한 것이었다. 작가의 글쓰기는 창조적 행위로 독자를 간과하고 자기 세계를 만드는 데에 몰두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황석영은 독자를 위한 작업을 추구한다. 지난해에 소설 ‘바리데기’도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의 한반도의 모습을 통해 독자와 공시적 통시적 시대 의식을 호흡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황석영 자신이 젊은이와 공감의 필요성을 느끼고 컴퓨터 앞에서 낳은 작품이다. 60대의 나이에도 블로그에 글을 연재하고 매일 연재 블로그의 덧글에서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고 쓴 글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독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황석영의 작가로서의 생명력은 여기에 있다. 작품을 통해 사회 현실을 형상화하고 그 의미망 속에서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오늘날 문학 시장이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그 탓을 시대의 변화에만 둘 것이 아니다. 황석영의 독자를 향한 심미적 인식에서도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