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사다’라고 나서지 않는다면 ‘교육’은 더 이상 우리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제도가 잘못되었으면 제도를 바로잡고, 사람이 잘못됐으면 사람을 들어내야 한다. 그 이유는 교육이 무너지면 첨단 분자사회가 온다 하더라도 실종된 ‘휴머니즘’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모 방송국에서 진행한 ‘나는 가수다’를 보면서 ‘나는 교사다’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졌다. 시쳇말로 진검승부를 가려야 한다는 도발적 의도인 셈이다. 정말이지 요즘은 교사다운 교사, 진짜 교사가 적지 않은가.
물론 최고의 가수를 가리는 것처럼 최고의 교사를 가린다는 것은 어렵다. 역시 척도가 주요 변수이다. 하지만 교사도 지역의 평가단으로부터 검증을 받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교사로서의 품격이라든가 전문성, 열정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가수다’에 참여한 일곱의 가수들은 사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대들이다. 어떻게 보면 최후의 1인을 가린다는 게 무의미하다. 그들은 잔재주를 부리는 ‘기인(技人)’이 아니라 소리에 정신을 불어넣을 줄 아는 ‘예인(藝人)’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쌓아온 가수로서의 입지를 포기하고 무대에 오른 용기, 그래서 우리는 숙연함과 동시에 전율을 느끼는 것 아닐까.
우리가 교단에 오를 때를 생각해 보면 너무 큰 차이가 난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어쩌면 평가단이기도 한데, 아무 준비 없이 그저 무대에 오른다. 비장한 각오나 떨림도 없다. 그저 교과서 한 권 달랑 들고 올라 중언부언한다. 그리고 평가단이 보건 말건 혼자 객설을 늘어놓다가 주어진 시간을 채우고 무대를 마감한다.
물론 아직 판단이 미숙한 아이들을 평가단이라 호칭하는 게 어폐가 있지만, 사고뭉치 아이들도 선생 보는 눈은 있다. 누가 열성적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를 하는지 또는 건성으로 시간을 때우다 가는지 느낌으로 안다. 졸고 장난치는 아이일지라도 집에 가서는 어떤 선생님이 진정한 분이라고 말을 한다. 바로 그런 요소들이 바위도 움직이게 하는 교사의 진정성이고 무쇠도 녹이는 열정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요즘 교직 사회 한켠에 구태의연함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문제다. 대안은 없다. 선지자처럼 전능한 교육 철학자가 나타나 길을 제시하더라도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질 게 뻔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집단일수록 변화를 싫어한다. 더러 진보란 이름으로 고질적인 병폐를 타파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교육적이지 못한 이념들로 혼란만 가중시켜 한계를 드러냈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는 엄숙한 개념을 세부 항목인 진보나 보수, 또는 여타의 명분의 틀로 다루려 했다는 게 문제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또한 인위적으로 수정할 수도 없다. 그것은 수 천 년 인류의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뿌리 깊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이론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개념 역시 아니다. 교육은 시공을 뛰어넘어 스스로 진화하는 유기적 생명체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육이 몸살을 앓고 있다. ‘가이아’가 지구를 자정하듯 이제는 ‘교육의 신’이 우리를 정화할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 스스로가 오염된 정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추방당할지 모른다.
정말이지 ‘나는 교사다’라고 나서지 않는다면 ‘교육’은 더 이상 우리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제도가 잘못되었으면 제도를 바로잡고,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사람을 들어내야 한다. 그 이유는 교육이 무너지면 첨단 분자사회가 온다 하더라도 실종된 ‘휴머니즘’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