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계속되면서 어느덧 한 학기가 끝나간다. 온통 흐린 하늘,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잠시 지나간 시간들이 얼굴을 내민다. 생각하면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들. 그러나 그 속에 아쉬움들이 파편처럼 박혀 있다. 온전하게 교사로서 아이들을 품어주고 사랑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밟힌다.
참으로 다양한 아이들. 성격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아이들. 생각과 행동도 다르고 꿈과 안목도 다른 아이들. 이렇듯 제각각인 아이들이 성당의 모자이크처럼 총천연색으로 비쳐진다. 교사의 품 안에 있는 아이치고 예쁜 놈 미운 놈 따로 있을까만, 선생의 품을 벗어나려는 귀여운 레지스탕스도 적지 않다.
일전에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가 방영된 적이 있다. 수단에서 활동하는 이태석 신부에 대한 이야기, 종교를 떠나 이 작은 필름은 그 파괴력이 대단했다. 시청자들의 가슴에 금을 내고 마지막 눈물까지 흘리게 했다면 지나칠까. 한 인간이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기꺼이 절망의 대륙으로 건너가 고통을 끌어안는 모습. 내전과 기근, 질병 속에 신음하는 이들을 끌어안는 그에게서 나는 문득 슈바이처와 다미안을 보았다.
홀연히 닥친 말기 암마저 감추고 환히 웃으며 기타 치는 그의 모습. 나는 성자의 아름다움이 저런 것이란 걸 몸소 느꼈다.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미소.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오직 수단에서의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짧게 세상을 떠나고 우리는 긴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제는 말한다. “수단의 아이들은 원래 울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너무 고통을 당해서입니다. 그런 저들이 지금 울고 있습니다.”
검게 타버린 톤즈 마을을 통째로 적신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빛깔로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것일까.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안락한 삶을 쳇바퀴 도는 내 모습이 왜소해 보였다. 어쩌면 사제나 교사나 같은 길을 걷는 사람 아닌가. 희생과 봉사의 삶을 약속하고 파견된 이들. 진리에 목마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고 스스로 낮아진 사람. 그게 사제와 교사 아닌가.
투둑투둑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무거운 세상의 신음소리가 잡힌다. 항공모함 움직이는 소리, 굴착기로 지구의 살갗을 뚫는 소리, 24시간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비명소리, 욕지거리와 협잡 소리 등등 온갖 음파들이 맥놀이를 일으킨다. 모든 정신과 사물들이 곤두서서 적대적 길항(拮抗)으로 노려본다.
그래도 톤즈 마을의 아이들은 순수했다. 오랜 내전에도 그들은 희망의 등잔을 준비하고 사랑이 점화되길 기다렸다. 종교가 뭔지 몰라도 신앙적이었다. 일용할 빵보다 사랑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기는 자본주의의 한국, 꽹과리 소리 가득하고 사랑이 파고 들 자리가 없는 인색한 땅. 이념의 실타래에 교권과 학습권이 발목 잡힌 논쟁의 땅. 진보를 외치지만 정작 사랑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시대.
수단의 아이들이 사랑에 목말라 했다면 이곳은 자본에 목말라 한다. 돈만 있으면 늘 즐거움을 충전할 수 있는 코케뉴(Cockaigne)의 도시. 사랑까지 거래할 수 있는 이곳은 즐겁다. 톤즈의 아이들이 그렇게 열망하던 교실이 우리에겐 감옥처럼 여겨지고 아이들은 탈주를 꿈꾼다. 선생은 존경과 권위를 벗고 샐러리맨이 되었다.
교직을 천직으로 삼고 아이들 가슴에 불을 지피고자 했던 열망도 장맛비에 파지직 꺼져간다. 선생이 사랑을 심어주려 해도 거부하는 아이들. 게임방, 노래방, 유흥점이 청소년의 권리장전이 되어버린 시대. 인의예지의 날개를 달고자 하던 두루미는 다 어디로 갔는가. 교실은 메추라기들의 떠드는 소리로 가득하다.
오늘은 아이들이 써낸 자기소개서를 읽는다. 스펙트럼의 분광처럼 아이들의 과거가 펼쳐진다. 매우 짧기만 한 시놉시스들, 안타깝다. 한 권의 위대한 책도 읽은 적 없고, 영웅 한 사람 사모한 적 없는 아이들. 태백산맥 능선에서 붉은 태양으로 세례 받아본 적 없는 아이들. 존재의 가벼움에 밤새 울어본 적 없는, 그런 아이들 틈으로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